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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Oct 21. 2022

세월

"학교에 예쁘게 입고 다니네."

최근 뇌종양을 발견한 동생과 병원 때문에 올라온 엄마가 차에서 내린 내게 말을 건넸다. 정장 원피스지만 이중으로 된 톤다운된 하늘거리는 샤 스커트와, 푸른 색의 동그란 귀걸이의 매치가 괜찮아 보였던 걸까.


동생이 아파서 세식구가 오랜만에 한 집에서 잤다. 각자 자식들 없이 셋만 있으니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생일 때 전 남자친구에게 선물 받은 스피커로 세상의 모든 음악을 틀자 엄마가 특히 좋아하셨다.

"이거 무선 충전도 되네? 좋다."

비록 내가 산 건 아니지만, 이제 더 만나진 않지만 물건이라도 남아 엄마가 좋아하시니 그걸로 되었다.


지난주에 동생이 왔을 때는 동생의 생일이 지난 지 얼마 안되기도 해서 내가 밥을 샀다. 어제는 직접 밥을 해주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시간을 놓쳐 동생이 보쌈을 주문했다. 새벽부터 비행기를 타느라 분주했던 두 사람이 피곤했던 탓도 있었다. 함께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자니 마치 동생이 서울에서 재수학원을 다녔던 때 같았다.

엄마는 동생 식생활에 부쩍 잔소리가 심해졌다. 야채를 많이 먹어야 한다느니, 아보카도 오일이 좋다느니. 유투브에서 돌아다니는 여러가지를 철썩같이 믿으셨다. 동생이 걱정이 되어서 그러시는 것일 터였다.


저녁을 먹고 지난 번에 동생과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하나씩 골라놓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꺼냈다. 꺼내면서 엄마가 뭐라 할까 눈치가 보였다.

"난 하나 먹을래. 너도 먹을래?"

동생이 아니라고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그 상황이 너무 웃겼다. 마흔이 다되가는 아들이 아이스크림 하나도 엄마 눈치를 보고 못먹는다니! 내가 먼저 소리 내 "하하하하"하고 웃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 동생이 "우헤헤헤" 얼굴을 마주보며 초등학생 때처럼 웃음보가 터졌다. 우리는 어렸을 때도 이렇게 연달아 오래 웃곤 했다.

엄마는 우리의 폭소에 숨겨진 의미를 금방 눈치챘다. 냉장고에 있던 쵸코 빵또아를 손수 꺼내어

"먹어."

라며 동생 손에 직접 까주셨다.

"먹고싶은 건 먹어야지."

엄마 얼굴에 멋적은 미소가 떠 있었다.


작은 내 방 침대에 쪼로로 앉아 걱정 없는 사람들처럼 가을 야구를 보고,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는 각각 방과 거실 한 칸씩을 차지하고 평화로이 잠을 청했다.


다음날, 동생이 깰까 미리 빼놓은 머메이드 회색 체크 스커트와 베이지색 니트, 그리고 숭덩한 분홍색 가디건을 입었다. 거실에서 자던 엄마가 깨셔서 출근 전 잠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우리 딸, 예쁘네."


평생 나의 부족한 면만 보시던 어머니가 이런 말을 다 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오늘은 화장도 어제보다 덜 했는데. 그만큼 엄마도 나이가 든 걸까? 엄마의 그 말이 다른 누구에게서 들은 것보다 더 참으로 들렸다. 역시 세상은 오래살고 볼 일이다.


다른 병원에 간 게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 전화를 해봤더니 시끌시끌한 수화기 너머로 기쁜 소식이 들렸다.

"10월 31일에 수술 날짜 잡혔다."

부산에서 신경과전문의를 하는 친구가 그 병원에 전화를 한 덕분 같단다.

돌아온 집, 저녁 나절 얼려둔 파를 꺼내려고 냉동실을 열었다. 동생이 어제 먹다 남긴 쵸코 빵또아 반쪽이 나를 보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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