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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Dec 21. 2022

우유 맛을 좋아하던 사람

 사람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한다. 막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여름만 해도 이혼 고민을 하는 지인에게

 "웬만하면 하지 마세요."

 라고 말렸던 내가 겨울에 접어들면서는 마음이 많이 안정이 되었다. 남편도, 아이도 없는 일상은 원래 갖고 있던 수많은 덧칠을 전부 다 뺀, 그러나 본디의 흰색은 아닌 누더기에 가까운 투명색 같다. 엄마에 선생님에 매 맞는 아내에 욕 듣는 며느리까지... 덧칠에 덧칠을 더해 거의 까맣게 변하던 그때는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시커먼 땅 속으로 꺼지는 줄만 알았다. 지인에게 이혼을 말렸던 건 소송이라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해서였다. 모든 게 끝난 지금은 갑자기 너무 가벼워진 발걸음이 다소 갈 곳을 잃은 것 같긴 해도 평온한 매일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 주말 면접 교섭 때 지희 머리가 땋여 있어 물어보았다.

 "오늘 머리 땋았네? 누가 묶어 줬어?"

 일요일 아침부터 머리를 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희는

 "할머니가."

 라고 답했다.

 "할머니가? 누구 할머니?"

 알고 보니 엑스의 어머니가 결국 손을 보태러 이곳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역시 그리 될 수도 있다고 미리 생각은 했었다. 남자 혼자 애 둘을 어떻게 키우나.


 더 개구쟁이가 되어가는 세희와 더 예뻐지는 지희는 만날 때마다 기쁘다. 밖에서 눈오리라도 만들고 싶었는데 너무 추워 그냥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돌아와 저녁에 우연히 카카오톡을 확인하는데 엑스의 상태메시지가 바뀌어 있었다.

 - 넌행복하니?

 나에게만 따로 설정해 놓은 멀티 프로필이란 걸 알기에, 상태 메시지도 내게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한창 법정에서 싸울 때는 인과응보니 뭐니 심한 말이 보이기도 했었다.


 멍해진 머리를 붙잡고 그 상태메시지에 답을 하려고 애써 보았다. 나는 행복한가?

 그랬다. 그를 보지 않고 별거해 나왔을 때부터 나았고, 서류가 완전히 정리되나서는 더 편안해졌다. 그는 내 인생에서 없앴어야 하는 사람이 맞았다.

 얼마 전까지 아이들 영상 통화 문제로 크게 싸워놓고는 이제 와 이런 질척거림이라니. 그도 나를 많이 사랑하긴 했을까. 그래서 이러는 걸까.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는 그런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어진 지 너무 오래되었다.




 '카이막'이라는 터키 디저트가 궁금했는데, 눈이 와 하얀 배경에서 학기 말 나에게 주는 선물로 한 번 맛보고 싶어졌다. 생소한 이름이라 혹시나 하고 배달의 민족에 검색을 해 보았는데 무려 군데나 팔고 있었다. 적당해 보이는 데서 시켜 느긋이 받아 교실에서 한 입 먹어보았다.

 다른 터키 디저트인 터키쉬 딜라이트나 바클라바를 떠올려서 무척 달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단 맛이 하나도 안 났다. 우유 맛을 응축시켜 놓은, 잼처럼 빵에 발라먹는 형태의 음식이었다. 우유 맛을 유난히 좋아하던 엑스가 나도 모르게 생각이 났다. 순 우유 아이스크림, 순 우유 케이크. 뭐든 자기 얼굴처럼 흰 걸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뭐 하겠는가. 이런 새로운 디저트가 나왔다고 다정히 얘기해 줄 수도 없는 남남이 되어버렸는 걸. 거기까지다. 가끔 이렇게 떠오르는 정도의 과거. 2014년부터 2020년까지 같이 산 시간은 이런 식으로 남았다.


 돌아서 타인이 된 우리에게 애달픈 인사를. 너도, 너의 선택을 후회하지 말고 묵묵히 걸어가기를. 네가 고집스럽게 지켜낸 두 딸을 최선을 다해 키워주기를.


 나도 너 없이 묵묵히 내 인생을 걸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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