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는 예보도 없이 시작된 눈은 아침에 출근하고서도 그칠 줄을 몰랐다. 제법 큰 송이송이로 떨어지는 그 모습이 예뻐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나갔다.
- 오빠 눈 좋아해? 눈 오는 날은 꼭 만나자.
떨어지는 눈 풍경을 보며전 남자 친구에게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눈이 올 때까지 그를 만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 말을 할 당시의 소망이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헤어지고 몇 번 문자를 주고받다가, 그마저도 하지 않은 지 좀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이 주 연속으로 주말에 그에게 전화가 왔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새 남자 친구가 생긴 뒤였으니까.
분명 그 전에도 전화를 받지 않으며
- 전화는 하지 마.
라고 못박아두었는데, 갑자기 왜, 헤어진 지 3개월이나 지난 이 시점에 다시?
순전히 그 이유가 궁금해서 걸려온 전화를 처음에는 받지 않았다가, 다시 걸어보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신호가 한 번 가더니 끊겼다.
- 전화해놓고 안 받는 건 뭐야?
라고 카톡을 보내보아도 숫자 1이 지워지질 않았다.
'아, 차단당했나.'
그런데 왜 먼저 전화해놓고서는? 자존심 때문인가 싶었다.
그러고서는 일주일 만에 다시 걸려온 전화, 이번에는 영화관이어서 온 줄도 몰랐다. 정말 왜, 라는 궁금함으로 차를 몰며 블루투스로 답전화를 걸어보았다.
"어, 안녕."
오랜만이지만 오래 들어 낯익은 목소리. 오빠 목소리는 그 외모만큼이나 차분하고 깔끔하다.
"무슨 일이야?"
왜 전화했는지 궁금해서 다시 전화를 건 만큼, 다른 얘기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난주에 전화했길래. 다시 전화 걸었더니 받지도 않고, 카톡 보내도 읽지도 않더니."
"그게... 네가 불편할까 봐."
분명 내가 불편하면 전화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은 또 전화했네? 하나만 하지? 안 할 거면 안 하고 할 거면 하고."
헤어진 연인에게 다정할 필요는 없었다. 냉랭해진 내가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아, 너한테 전화하고 나서 메일을 하나 받았는데..."
예전처럼 일상 얘기를 시시콜콜 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오빠, 메일 얘기하지 마. 안 듣고 싶어."
더 이상 그의 일상이 궁금하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어, 그래. 내용이 좀 안 좋은 거여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인데... 어디야?"
"영화 보고 들어가는 중이야."
"어, 그래. 무슨 영화?"
거기서 또 말문이 막혔다. 내가 본 영화가 이제와서 왜 궁금한가.
"말 안 할래. 우리 이제 그런 거 공유하는 사이 아니잖아?"
그가 나를 떠난 데 대한 후회를 육성으로 듣고 싶었는데, "지난 일 후회해 봤자"라는 말만 내놓고선 구체적인 이야기가 일절 없다, 아쉽게. 널 떠나서 내가 너무 힘들다고, 돌아와 달라는 말까지 듣고 싶었는데.
"나 새로 만나는 남자 친구 있어."
"아, 그래... 어떤 사람이야?"
"나보다 다섯 살 어려."
"그래? 잘 됐다."
이 상황에서 잘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그의 마음도 나로선 헤아리기 힘들다. 질투가 나야 정상일 것만 같다.
"잘 됐다고?"
"그럼, 잘 됐지. 어때 좀 부드러워?"
"아니, 많이 거칠어. 오빠랑 좀 달라. 그런데 처음이라 그런지 그런 게 싫지는 않네."
그 애가 아니어도 다시 전 남자 친구를 보는 일은 없었을 거다.
"강남 오면 연락해."
"아니, 안 할 거야. 그러니까 오빠도 연락하지 마."
그렇게 매듭의 매듭을 한 번 더 지었다. 더는 묶을 실도 남아있지 않았다.
- 난 운동 끝나고 집 왔어.
- 잘했어 토닥토닥. 저녁은?
- 아까 먹었지. 밖에 마니 춥지? 따뜻하게 입고 나왔어?
- 뭐 먹었어? 응 따뜻하게 입고 나왔으.
이 아이는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물어본다. 그와 다르다.
- 나 오늘은 싸이 버거 하나ㅎ
- 그거 같다 돼?
- 학교 앞 편의점 들를 일이 있어서 갔다가 바로 근처라 하나 사 와서 먹었어요. 지금 사놓은 아이스크림 몇 숟갈 먹어요ㅋ
- 그랬구나ㅠ
그리고 나를 걱정한다.
- 응 괜차나~ 왜~ 엄마 전화 와서 똑같은 거 물어보길래 혼날까 봐 김밥이라 그랬다ㅋㅋ 패스트푸드 먹는다 그러면 혼나거든. 요새 밥 안 먹어도 배불러. 밖에 아무리 추워도 안춥구ㅎ
- 으이긍ㅋㅋ
별 거 없는 사소한 안부를 묻는 대화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어제 만난 두 딸이 별일 없이 밝아 보이는 만큼 나도 잘 지내야겠지.
- 애들 둘이서 잘 논다~ 썰매 타고 낚시하고. 오랜만에 보니 첫째가 부쩍 큰 거 같네.
- 아 진짜?
- 응 나 닮았는데 내가 키우질 않으니 내 딸인데도 내 아이가 아닌 듯도 같이 느껴져. 자주 못 보니 마음도 적응을 해야겠지.
- ㅠㅠ 토닥토닥
- 나 없이도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다행스러우면서도 좀 그렇네.
- 에공 쓰담쓰담
2주에 한 번 만나는 엄마에게 매달리거나 울지 않고 쿨하게 헤어지는 6살 쌍둥이 딸이 그가 보기에도 신기한가 보다. 하긴, 나도 이런 엄마와 딸이 있다는 게 신기한데 그 애라고 안 그럴까. 그에게 첫째와 둘째가 이란성이며, 첫째가 둘째보다 몸집이 크고, 둘이 성향이 아주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둘째가 나를 닮아 공주처럼 꾸미기를 좋아하지만 목소리가 크고 똑 부러진다는 말을 하며 한 번 더 웃는다.
지금 곁에 그애가 같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 따뜻하다. 뜨거운 것도 같다. 세상 많은 사람 중에 너를 만나 이렇게 추운 날 마주 보고 앉았던 걸 후회하지 않기를. 너를 오랫동안 다정하게 사랑할 수 있기를. 뒤돌아 냉정해진 모습은 나도 싫으니까.
결혼이 하고 싶다던 전 남자친구는 꼭 그에 맞는 사람을 찾길. 그가 내 새 시작을 덤덤히 응원하는 만큼, 나도 그렇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