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맞는 것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일
20대의 젊은 미혼부가 아이를 때려죽인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우리 쌍둥이도 남편에게 번갈아 맞았어서 남일 같지 않은 마음에 기사 내용을 유심히 읽어보았다. ‘울고 칭얼대서 던져 죽였다’는 것 외에 ‘왜?’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나도 몰랐었다. 왜 어떤 아버지들은 우는 것밖에 못하는 갓난아기에게 그러는 건지.
2017년 여름, 아이들이 태어나고 2주간 산후조리원에 머물다 집으로 왔다. 첫날부터 산후도우미분이 오셨고 친정 엄마가 일주일을 같이 계셔주셨다. 첫 사건은 엄마가 집으로 내려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신생아 두 명을 어른 두 명이 일대일로 돌보는 건 상상을 초월할만큼 힘에 부쳤다. 아이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해주느라 보호자의 식사와 수면은 희생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갓 태어나 우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적의’를 갖는 건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 비정상적인 적의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약자가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가 아닌 ‘나를 짜증 나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는 소음’으로 인식할 때 작동했다. 가부장인 자신에게 그 아기는 정면으로 반항을 하는 셈이 되었으므로.
34평 아파트 양쪽 끝 방에서 아기 하나씩을 맡아 재우는데 “짝”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뺨 맞는 소리였다. 설마 했는데 놀라서 뛰어 가보니 애 볼이 빨갰다. 남편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울지 말라고오! 좀 자라고!!”
열 달 간 몸 안에서 애지중지 키워 세상에 나오게 한 귀한 자식에게 악마가 찾아온 것 같았다. 지금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는 남자가 진정 애들 아빠가 맞는가 싶었다. 남의 자식도 아니고 어렵게 가진 친자식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다.
이런 일은 끔찍하게도 네 번이나 반복됐다. 한 공간에 있으며 직접 보고들은 것만 세 번이었다. 폭력성이 나아지지 않아 결국 경찰에 고소를 하고 조사를 받게 되면서 남편은 스스로 한 건이 더 있었음을 자백했다.
아이들 50일 기념사진 촬영을 갔던 날이었다. 임신기간 동안 곱슬머리가 지저분하게 자라 손질하기가 어려웠다. 그 날 휴가를 내기로 한 남편에게 촬영 후에 천연펌을 좀 하고 와도 되겠냐고 했다. 순순히 동의를 해주었다. 출산 후 처음으로 외출할 마음에 잠시 기분이 들떴었다.
그런데 산후도우미분이 퇴근하시는 6시 이전에는 꼭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른 이의 보는 눈이 없으면 그는 언제든 괴물로 변신할 수 있었으므로.
걱정되는 마음에 점심도 먹지 못하고 바로 미용실로 갔다. 하지만 파마를 다 하고 머리를 말리는 즈음 이미 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신데렐라라도 된 것처럼, 아니 집에서 시한폭탄이라도 곧 터질 것처럼 초조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6시 15분쯤 전화가 왔다. 낮에 산후도우미분이 계실 때 낮잠도 자고 식사도 잘했다며 걱정 말고 천천히 오라고 한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으아앙”
전화기 너머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 지금 얘 또 때릴 것 같다. 빨리 와라.”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분에 휩싸였다.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숨이 넘어갈 듯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에게 차마 애를 또 때렸냐고 묻지 못했다. 이듬해 경찰 조사에서 사실 그때 첫째 아이를 또 때렸었다는 자백을 수사관에게 전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이후 남편은 계속해서 분노 조절을 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나 화가 쌓이면 욕으로 시작해 손을 부지기수로 올렸다. 하지만 그가 내 마음속에서 가족의 지위를 잃은 건 나를 욕보인 다른 날들이 아니라 맨 처음 아이들 뺨을 때렸던 바로 그날이었다. 엄마로서 그의 행위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다만 어떤 아빠들은 이렇게 자기 자식에게 잔인하게 굴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 한 세월,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설명하기까지 그보다 더 긴 세월이 걸렸다. 남편은 자신이 애들을 때린 걸 내게 이야기했던 이유가 자기를 ‘이해해주기 바래서’였다고 했다. 그는 정말 내가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이해해 줄 거라 믿었을까? 그렇게 철이 없었을까. 내가 엄마가 되어가는 동안 그는 아빠가 되기는커녕 자기 엄마가 필요할 만큼 다시 어려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제 막 바이러스가 창궐해 ‘잘 알지 못함’에서 비롯된 막연한 공포가 횡행하던 작년 이맘때, 남편은 나와 상의도 없이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리고 갔다. 그때 어린이집은 휴원 상태였고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고선 아무도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염병에 걸릴 지 몰라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보통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내가 아이들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번은 출근해야 했어서 그럴 땐 남편이 휴가를 냈었다.
‘아무리 애 둘을 보는게 힘들어도 그렇지 그 하루를 못참고 어린이집에 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키즈노트로 날아온 사진 속에는 남편만이 마스크를 꽁꽁 쓰고 있었다. 아이들은 정인이처럼 마스크를 안 낀 채 놀고 있었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를까 아기방의 cctv를 켜놓고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을 하고 있던 나는 그 알림장을 보곤 가슴이 떨어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제 있었던 2차 가사조사는 미해결 종결 처리되었다. 남편이 아이를 뺏길 것 같다며 죽어도 아이들을 보여주지 않고 있어서 정상적인 3차 가사조사를 진행하기 힘들다는 게 조사관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8차에 걸친 부모 평가를 새로 받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평가가 시작되면 아이들을 법원으로 데려와야 한다고 하자 남편은 ‘코로나가 걱정돼서 기차를 타기 힘들다’는 핑계를 댔다. 지금은 기차도 타기 힘들 정도로 무서운 코로나가 어째서 작년 3월에는 마스크도 씌우지 않고 어린이집을 제 발로 찾아갈 만큼 안 무서웠던가 싶어 한마디 크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흥분하지 않고 차가운 전쟁의 신이 되겠다는 다짐처럼 그저 가만히, 조사관의 표정을 살폈다. 그 순간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제발 이 사람도 저 남자의 앞뒤 다름을 눈치채기를 가만히 가만히 바라는 것이었다.
곧 아이들이 새집으로 올 줄 알았는데 새로 부모 평가가 시작되어 또다시 시간이 미뤄지는 모양새다. 그냥 남편 쪽을 임시 양육자로 정하고 하루빨리 면접 교섭을 하면 어떻겠냐고 조사관이 조사 시작부터 나를 타일렀다. 하지만 이미 오래도록 보지 못하고 있는 터, 하루 이틀 빨리 만나는 것보다 하루빨리 안전한 내 품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싶다고, 나긋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할머니 밑에서 우리 딸들이 조금만 더 잘 버텨주었으면, 내가 달려가 찾을 때까지 제발 아무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부디 우리 머지않은 때에 온전히 만날 수 있었으면. 그러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