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에 나리는 눈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면

by 이주희

어제는 절기상 입춘이었다. 영화로 치면 본편 ‘봄’을 알리는 예고편 정도의 날이랄까. 그런데 그 의미가 무색하게 오후부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르게 교실 컴퓨터를 퇴근 직전까지 끄지 못했다. 새로 부임할 학교 이름이 발표 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공립학교 교사는 5년에 한 번 정기전보로 학교 이동을 한다. 나는 2년간 육아휴직을 한 탓에 무려 7년 만의 이동이었다. 7년 중 2년은 학교와 가까운 방배동에 살았었지만, 그 후 5년은 이사를 가 버리는 바람에 편도 한 시간 반이나 되는 거리를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다녔다. 아이들이 두 돌도 되지 않았는데 생활비가 없어 조기 복직해야했던 2019년에는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정기전보는 보통 거주지를 고려해 가까운 학교로 발령을 내어 주는데, 내 주소지에서 가장 가까운 강동송파교육청은 선생님들 거주지가 몰려있어 까딱하면 다른 지역 교육청으로 튕길 수도 있었다. 어차피 지원서는 몇 달전에 내 손을 떠났고 결과 발표만 기다리고 있던 바, 그간 별로 신경쓰지 않고 지내왔었다. 하지만 막상 발표 하루 전날이 되자 나는 만약의 결과를 생각하며 혹시 또 먼 학교로 통근을 해야할까봐 초조해졌다.

‘혹시 왕십리 같은 데로 나면 어쩌지? 이제 아이들 오면 내가 혼자 키워야 하는데...’


퇴근 시간까지 교무실에서 아무 연락이 없길래 직접 문서등록대장을 클릭한 그 순간, 눈에 「2021학년도 정기전보 결과」라는 글자가 크게 들어왔다. 이제 막 도착한 공문임에 틀림이 없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아이들 돌볼 걸 생각해도 무조건 집에서 10분 이내의 가까운 곳이 최고다, 라고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내이며 첨부파일을 “딸깍”하고 더블 클릭을 했다.

‘이럴 수가...!’

집에서도 가깝고, 새로 이사 가는 아파트에서는 차로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생각했던 최상의 시나리오보다 더 좋은 결과였다. 학교 이름을 녹색창에 치고 학생 수와 교원 수를 확인했다. 학생이 총 천 명 가까이 되는 큰 학교였다. 교사 한 명당 학생 수도 서울시 평균과 비슷하게 양호했다. 그리고 지하철역 바로 옆에 붙어 교통이 무척 편리해 보였다.

‘와아...’

나는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 못하며 내가 받게된 운에 감탄했다. 그동안 무언가 베풀고 착하게 살았던가 하는 의심도 해 보았다. 왜냐면 이건 베스트 오브 베스트,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자 눈은 점점 세차게 내렸다. 친구와 삼겹살 집에서 만나 가장 좋아하는 샴페인인 폴 로저를 땄다. 미숙한 오픈 실력 때문에 샴페인 마개가 ‘펑’하고 폭죽처럼 위로 튀어 올랐다. 그리곤 유리창 밖에 내리치던 눈보라처럼 흰 거품이 사방으로 흩트려 뿌려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여느 때처럼 정류장에서 학교를 가기 위해 육교를 오르다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그 다리에서 차들이 달리는 저 아래로 떨어져 이내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싶었던 2019년의 내 모습을. 너무너무 집에 가기 싫지만, 그 공포스러운 집으로 들어갔다 다시 그 먼 길을 돌아 꾸역꾸역 출근하러 오는 그 생활을 죽어서라도 그만둘까 매일 아침 이 육교를 걸으며 생각했던 가여웠던 그 모습을.

어제의 봄 예고편은 어쩌면 인생의 혹독했던 겨울을 이제 그만 뒤로 하고 따뜻한 햇살을 쪼일 일만 남은 봄의 절기로

들어가라고

걸어 들어가라고

그렇게 알려주려는 게 아니었을까?

이번 ‘봄’ 본편은 막상 표값을 치르고 영화를 보았더니 본전 생각이 나는, 그런 예고편만 요란한 영화가 아니기를 바래본다. 입춘이 내게 보여주었던 그 어마어마한 스케일 그대로 눈물 나도록 기쁜 일이 가득한 인생의 봄날을 기대해도, 실망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인생의 겨울이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면 이번보다는 담담히 그 추위를 견딜 수 있었으면 하고 나지막히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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