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로 산 집

by 이주희

내가 최근 세일로 산 물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집'이다.

집을 어떻게 세일해서 사느냐?

그린벨트 해제 지역에 분양했던 단지라 주변 시세에 비해 파격적인 가격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방이 네 개, 화장실이 두 개나 돼 혼자 살기 퍽 넓은 이 집이 나는 좋다. 앞으로 야트막한 동산이 자리 잡아 반대쪽에서 나를 쳐다볼 시선이 없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꽤 높은 층이라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과, 밤이 되면 먼 곳의 반짝이는 불빛이 다른 어느 곳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어린 쌍둥이를 돌보면서는 샤워할 시간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잠시라도 몸을 씻을 짬이 나더라도 벗어놓은 속옷을 미처 다 치우지 못할 때도 많았다. 남편의 폭력으로 작년에 마지막 상담을 받던 어느 날 상담사가 그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 샤워하고 속옷 안 치울 때 많으시죠? 속옷에 혈흔이 묻어있는 채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걸 남편 분이 보시면, 여자로서의 매력을 못 느끼겠다 하더라고요."


여자로서의 매력?

아, 그래서 그 인간은 집에 오자마자 애들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샤워하러 들어가기 바빴던 건가? 그렇게 긴 시간을? 어이가 없었다. 쌍둥이 출산 후 생리 때마다 과다 출혈로 빈혈이 걱정돼 미레나 시술을 받았다. 그 후 양은 확연히 줄었지만 부정기적인 출혈이 계속됐다. 두 아이 돌보면서 피 마를 날이 별로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걸 보고 '여자로서의 매력'을 찾다니!

상담사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은 된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난 후 그가 더 징그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이 상담사 이전의 정신과 의사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최근에 간통죄 폐지된 거 아시죠? 다른 사람을 만나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거.”

그래서? 남편이 다른 여자 만날지도 모르니 나더러 남편 간수 잘하라는 건가. 말문이 턱 막혔다.


상담 올 때마다 얼마나 남편이 무서운지 얘기했어야 했을까. 그들은 같은 여자여도 몰랐던 걸까.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뇌리에서 사라질 내용은 아니었을 텐데. 무력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숨이 끊어져라 남편에게 목을 졸려본 여자에게 할 말로, 저런 건 어딜 봐도 적절하지 못하지 않은가. 하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은 숨을 들이마시길 원하는데 강압에 의해 숨 쉴 수 없는 그 상황을,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그의 조인 손아귀 힘에 반발해 미친 듯이 날뛰는 맥박에 대해, 그녀들이 뭘 알았겠는가. 내게 되돌려 들려오는 ‘켁, 켁’하는 소리와 함께 어쩌면 이게 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정말 나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악다구니 있는 양 손의 뜨거움을 통해 느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절대로 알기 어려운 일이겠지.



혼자 지내는 요즘의 나는 그때보다 시간에 훨씬 여유가 있다. 어차피 나 말고 아무도 없는 집이기도 해서 굳이 샤워하고 난 뒤 바로 옷을 찾아 입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때로는 벗어놓은 속옷을 빨래통에 넣는 일을 먼저 하기도 한다. 나만의 공간,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이기에 나신으로 거실을 돌아다녀도 괜찮다. 그렇게 느릿느릿 물기가 채 다 마르지 않은 벗은 몸 그대로 집안을 걷다 보면 마치 세상의 모든 속박과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진 느낌마저 든다.


그래 봤자 제일 안쪽 방과 거실, 부엌만을 주로 쓰는데도 나는 이 집이 참 좋다. 이 적막과 고요함을 만끽한다. 언젠가, 곧, 반드시 두 아이가 이 공간을 채우겠지만, 나 혼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좀 더 아끼고 아쉬워하고 싶다.


저렴하게 사긴 했지만 이 집에 엄청난 은행 빚이 껴있다는 점을 덧붙인다. 이혼 소송과 재산 분할이 모두 끝나고 나면 아마도 이 빚은 오롯이 내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은행 빚을 제외하면 진짜 '내 것'인 공간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딱 그 정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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