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도시의 이혼녀

by 이주희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나에게 대체 공휴일은 별로 반갑지 않다. 지난주 월요일에 이어 이번 주 월요일도 뭘 하며 보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일요일에 만난 MBC 회원 분이 '쁘띠 마망'이라는 영화 얘기를 했는데 괜찮아 보였다. 예술 영화라 집 근처에서는 상영하지 않았고, 잠실 롯데시네마 아르떼관에 조조가 있길래 가보기로 했다.


여러분도 그런 예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커서 이런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예감.

우리 식구는 경남의 한 계획도시에서 쭉 살았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셨고, 어머니는 가정 주부셨다. 우리 집은 늘 근검절약이 배어있었다.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해이던가, 그즈음에 남동생의 삼수도 마침내 끝이 나고 엄마와 나, 그리고 남동생 셋이 홋카이도로 여름휴가를 갔다. 아빠가 빠져 셋이긴 했지만 가족이 함께 해외여행을 간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엄마는 이름 있는 대기업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구매해놓고 정작 거기 가서 쓸 여비는 2만 엔인가밖에 바꾸지 않았다. 나는 인터넷으로 면세점에서 제이에스티나 시계를 주문해놓고, 내 여비로 3만 엔인가를 바꾸었다. 면세품 인도장에 들러 그 물건을 받자마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예뻐 웃음을 참을 수 없던 내 면전에 엄마의 잔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넌 어쩌려고 그렇게 돈을 안 아껴 쓰니?"

내가 내 돈 쓰는데, 억울했다. 이제 갓 대학생이던 남동생도 엄마 편을 들었다. 그들에 따르면 나는 16만 원짜리 시계를 사면 ‘안 됐다’. 그렇게 한 편이 된 두 사람에게 혼이 난 뒤 나는 여행 내내 돈 쓰는 데 있어 그들의 눈치를 보게 됐다. 첫날 오타루의 유명한 오르골 가게를 가서도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 나중에 그래도 홋카이도에 온 기념으로 오르골 하나를 사려해도 그 가게만큼 질 좋은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는 때를 놓치면 나중에 돈이 있어도 다시 그만한 걸 사기 어렵다는 교훈을 그때 얻었다.


그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절약!'이라는 엄마의 잔소리는 내 월급에서 강제로 100만 원짜리 청약부금을 드는 식으로, 나는 다시 그걸 깨는 형태로 그 후 몇 년 간 지속되었다. 이렇게 나는 우리 집의 별종, 우리 집의 미운 오리 새끼처럼 지냈다. 지금도 '필요한 데 좀 쓰면 어때?'라는 마음으로 산다. 그렇게 보고 싶은 책 사 보고 맛있는 음식, 와인 맛보며 산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을 마음 한쪽에 하면서.




비행기가 착륙해도 끄떡없을 정도의 넓은 왕복 십몇 차선 도로 위를 혼자 조조 영화를 보기 위해 내 차를 운전해 달리고 있었다. 저 앞에 높디높게 우뚝 선 롯데월드타워가 '여기는 도시 중의 도시'라며 뽐내고 있었다. 내 고향은 저 남해 바다 가까운 반도의 끄트머리였으나, 어쩌면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커서 이런 도시를 내 집 앞마당처럼 다니며 살게 될 거란 걸.


차들이 무서워 시내로는 차를 잘 가져가지 않았는데 롯데월드 몰까지 아무 일 없이 주차를 하고, 영화를 보고, 다시 집까지 무사히 운전해 돌아왔다. 그런 내가 대견했다. 더 이상 이런 일을 할 때 다른 누구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혼자서 대부분의 일을 해결하고, 이런 조금은 두려웠던 일들에 점점 편안해지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어쩌면 이런 외로운 패턴이 앞으로도 내 운명 안에 반복될 것 같은 그런 슬픈 예감에 마음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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