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의 그늘과 개인적 소망 사이에서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남녀 간의 결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여자는 남자의 재물을 보고 결혼한 거라면 나중에 남자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더라도 이혼할 일은 아니지 않냐고. 애초에 서로가 미끼로 걸려들었으면 그 이상의 사랑을 바라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 아니냐고.
... 나는 어땠을까.
이미 앞서 결혼한 친구들에 비해 누가 봐도 뒤떨어지는 그런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서른 전후 나는 부지런히 짝을 찾으러 돌아다녔고, 바라는 만큼 근사한 남자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땐 그게 내 한계인 것 같았다. 그러다 자궁 경부에 문제가 생겼고, 가임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졌다. 말하자면 결혼이란 내게 일종의 타협 같은 거였다. 외모가 그다지 떨어지지도 않고, 월급은 나보다 조금 더 받아 그럭저럭 생활이 만족스러울 만한 그런 사람과. 약간 부족한 듯한 부분은 다른 정신적인 부분에서 보상받으리라 기대하며 결혼을 감행했다.
그렇게 내 속의 명과 암을 모조리 끄집어 보여주었더니 전남편은 지금 법정에서 나를 자해 이력에 거식증까지 앓는 반 정신병자 취급을 하고 있다.
그렇게 내 믿음이 크게 한 번 배신당했다고
세상 모든 남자에게 마음을 닫고 살아가자니
아직도 가끔 내가 ‘반짝’하는지
나를 보고선 눈이 커지고 덥석 다가와 말을 걸려는 순간들이 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만나는 사람 있어도 상관없어요.”
라며 호기롭게 연락처를 물어보는 사람이라던지,
전남편의 어떤 행동을 탓하는 말끝에
“어머니, 예쁘잖아요.”
라고 해서 어안을 벙벙하게 한 법원의 상담위원이라던지,
우리 반 한 남학생이
“선생님은 왠지 여기 새로 생긴 e아파트에 사실 것처럼 생겼어요.”
라고 할 때,
그리고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르려 무심코 화장대 거울을 보았는데
어제보다 좀 더 예뻐 보일 때,
그럴 ‘때들’이 모여 내게 묻는다.
이번은 정말 도망갈 수 없이 크고 쓰라린 실패지만
세상 어딘가 내 속의 빛과 어둠을
이해해 줄, 안타까워해 줄, 다독여 줄, 그리고
이렇게 부서진 나라도 앞으로 함께 살아가고 싶어 할
그런 누군가가 한 명쯤은 있지 않겠느냐고. 어쩌면 아직 봐줄 만한 이 얼굴을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는 채로 이 방에 처박혀 홀로 늙어갈 거냐고.
...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이렇게 나는 소송이 한창인 지금도 한 여자로서 살아갈 다가올 많은 남은 날들을 걱정한다.
엄마이기 이전에,
나도 결국 세상에 이해받기 위해 태어난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니까. 내 단단한 껍질 속 무수한 사연들을 어쩌면 세상에 한 명쯤은 보듬어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지금 이 순간조차 품는 게 과연 정상일까.
그렇게 나는
비슷한 예감으로 재혼할 수도 있을까.
그렇게 된다 해도 그 후 이번과는 다르지만 역시 매우 기막힌 이유로 다시 이혼하며
지금의 나를 탓하고 더 큰 불행으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는 서로를 보아주는 한 사람 정도는 있어야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싶다.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또 뜨겠지.
좌로 우로 흔들리며,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아니 최소한
그렇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누가 이런 내게
“헛된 생각 하지 말아요.”라고 한다면
나는 거기에 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