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한 날, 쓰고 있었다

소리없는 고해성사

by 글쓰는 한큐

처음 펜을 잡았을 땐

써내려가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안에 끓어오르는 감정의 덩어리를

모두 뱉어내 열을 식히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썼다.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살려고 썼다.


우습게도 사람은 참 간사하다.

이제 좀 살 만해지니

금세 펜을 내려놓는다.


절박하던 나는 어디로 갔고

무엇에 대해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사랑받을 수 있을지

소재를 고르는 나를 발견한다.


나를 마주보기 위해

진실된 글을 쓰고자 했던 나는

어느새 잘 쓰고 싶어 문장을 다듬고

의미 없는 멋을 부린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껏 꾸민 문장을 지어낸다.


이런 위선적인 나를

이토록 빨리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싫어하던 나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자 숨고 싶어졌다.


더 이상 펜을 잡는 일이

즐겁지 않았다.

추악한 속을 애써 감춘 채

겉만 번지르르한 글을 바라보는 일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직도 나는

착한 아이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어리석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타인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스스로를 먼저 검열한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시작한 글을

어느새 인정받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조금 거칠고,

조금 저속하면 어떤가.

이 또한 나임을 인정해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가면을 붙잡고 있다.


내려놓으면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 세게 움켜쥔다.


사실 알고 있었다.

내 안에 이렇게나 후진 모습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수십 년을 외면하며

아닌 척 연기해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잃어버렸다.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고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지만

나는 그리 착하지 않다.

관심과 사랑을 부담스러워하고

언제나 도망치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이런 나를 글로 쓰는 순간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혹여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내 추악한 진심을 알아채고

실망하거나 상처받을까 봐

무서웠다.


내가 숨통 좀 트여보겠다고

모든 걸 내려놓고 드러내버리면

누군가는

진실에 다칠 것만 같아서

차라리 혼자 안고 살아가려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괜히 연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글을 쓴 것을 후회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편은

조금 가벼워졌다.


죄책감과 개운함이

나란히 남아 있다.


써야 하는데 쓸 수 없는 날.


이건

나의 소리 없는 고해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