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에, 이 장면_화양연화

전하지 않았기에 전할 수 있었던 마음

by 글쓰는 한큐

2014년 12월 19일,

아주 이상한 하루였다.

기말고사가 막 끝나 개운한 마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이라 가게는 사람들로 붐볐고, 정신없이 바쁘게 일했다.

마감 시간이 되어 정리를 하고 퇴근하려는데

순간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전원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세상은 고요했고,

그 안에서 나만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잃어버린 게 없는데 그리움이 몰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홍콩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그 후 매년 12월이 되면 나는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본다.

벌써 10년째라 이제는 질릴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이 계절이 오면 홍콩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어느새 화양연화를 찾고 있다.

볼 때마다 나를 멈춰 서게 하는 장면이 다른

참 매력적인 영화다.

처음에는 화려한 배경과 장만옥의 아름다운 치파오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 시절의 나는 아직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기엔 어렸다.


세월이 흐르고 스쳐간 인연들이 쌓일수록

이 영화는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뜨겁고,

이별이 사랑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이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이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만 잠깐 겹쳤다가

곧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장면.


예전에는 그 장면이 답답했다.

왜 말을 하지 않는지, 왜 저렇게까지 조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진 감정이 사랑이라면,

조금은 흔들려도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이제는 그 침묵을 이해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서 지킨 것들이 있었고,

넘지 않아서 남겨진 마음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화양연화 속 두 사람은 끝내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마음을 품고 있었을 뿐이다.


아마 내가 매년 12월이 되면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이유도

그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끝내 하지 못한 말들,

조금 늦어버린 마음들,

그리고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나 자신을

이 장면에 잠시 겹쳐 보기 위해서.


올해의 나는

마음을 붙잡기보다 조용히 보내주려 한다.

말하지 못했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까.

때로는 시간이 흘러 아주 먼 훗날에 그 마음이 전해질 때도 있는 법이니까.


12월의 화양연화는 늘 그렇다.

사랑을 가르치기보다 침묵을 이해하게 하고,

선택보다 남겨진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아마 내년의 이 계절에도

다시 화양연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의 나는 또 어떤 장면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 계절에 당신은 어떤 장면에 머물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