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과학으로 알아보는 언어 습득의 비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의 직장 일과 관련하여 1년간 미국 미네소타 주에 거주했다.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정확한 문법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말을 통해 학습한 어순이나 시제를 활용하여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고, 또래의 한국 학생들보다 높은 어휘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발음 또한 좋은 편이었다. 미국의 중간 위쪽에 위치한 미네소타주에서는 한국에서 '표준'이라며 가르치는 정통 미국식 영어 발음을 사용한다.
하지만 중, 고등학교 때엔 영어를 직접 발음할 일이 많지 않았다. 대학교에 와서야 외국인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할 일이 생겼다. 나의 외국인 친구들은 주로 한국에 교환 학생을 온 친구들이었거나 또는 이태원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외국인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문법이나 어휘는 중고등학교 내내 꾸준히 공부를 했기에, 큰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긴 시간 영어를 말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입에 영어 발음이 잘 붙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단어를 말하고자 했을 때, 그것이 잘 발음이 안되어 친구들이 잘 알아듣지 못할 때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R'과 'L' 발음, 'th' 발음을 할 때에 이전보다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 발음을 좋게 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찾기 시작했다.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할 때 내가 좋지 못한 발음을 말했을 때 지적해달라고 했고,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해외 프로그램을 자막 없이 시청하며 미국 네이티브 스피커들이 사용하는 발음과 표현을 습득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발음 실력은 끝내 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어느 한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청력에 장애가 없는 아기들은 모두 성숙한 달팽이관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음의 높이와 크기를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은 또한 모든 언어를 아우르는 세계 시민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전 세계 어떤 언어에서 사용되는 음소라도 듣고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모국어에 노출됨에 따라 아기는 자신의 환경에서 나타나지 않는 음소를 듣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운명의 과학 p.50~51>
우리의 뇌에서는 효율성 추구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와 직접 관련이 있는 말소리에 맞추어진다. 배경 잡음을 걸러 내고 언어학적으로 중요한 내용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이런 능력이 없다면 먼저 말을 이해하고, 이어서 말을 하는 방법을 배우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의 뇌는 처음 언어를 배우는 우리가 그 언어를 습득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이 과정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네이티브 스피커'가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열 달 된 미국 아기를 검사한다면 그 아기의 귀에는 힌두어에서만 사용되는 음소의 차이는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겁니다. 이것은 '지각 동조'라는 것의 일부죠. 이것을 하려면 뇌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귀 가까이 자리 잡고 있는 뇌 영역인 청각겉질이 성숙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곳의 신경 회로는 환경적 경험을 바탕으로 연결되고, 개선되죠. 이 과정은 대략 생후 첫 1년 동안에 일어납니다. <운명의 과학 p.51>
생후 첫 1년 동안에 내가 앞으로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정해진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 언어에 정착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고 그 언어를 통달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네이티브 스피커가 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외국인들과 어떻게 원활히 소통할 수 있을까?
미국에는 다양한 민족이 생활하고 있다.
애초에 미국이란 나라는 유럽에서 건너온 다양한 문화들이 어우러지며 탄생한 나라이다.
그렇기에 미국 내에서는 다양한 발음 또한 존재한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투리가 심한 미국 남부식 영어 발음부터 시작하여, 영국식 영어 발음, 인도식 영어 발음, 일본식 영어 발음, 또는 어린아이들과 어른들이 사용하는 발음마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의 학교에서는 미국 동부에서 사용하는 영어 발음만을 가르친다. 나 또한, 이러한 발음을 배워왔고, 사용했기에 내가 처음 토익 시험을 보러 갔을 때에, 영국식 영어 발음과 호주식 영어 발음으로 리스닝 지문을 들었을 때에는 쉬운 단어로 구성된 문장임에도 이를 파악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서는 발음을 잘해야만 영어를 잘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어휘가 좋지 않아 고차원의 문장을 만드는 능력이 없더라도, 발음이 좋으면 '영어를 잘하는 사람', '외국에서 좀 살다온 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영어 실력은, 발음이 아닌 어휘와 문법, 읽고 쓰는 실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영어 발음이 미국식 영어 발음과 한국식 영어 발음이 반씩 섞인 발음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R과 L' 발음이 안되고 특정 영어 단어를 빨리 발음하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나는 내 발음을 좋아한다. 나는 내 '한국식' 발음에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으며, 내가 한국식 발음을 한다고 해서 외국인들과 의사소통하는 것에 큰 무리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굳이 '미국식' 영어 발음을 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충분한 연습을 통해 그 언어를 표현하는데 정확한 소리를 내는 것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지만, 한국식 억양과 발음을 미국식으로 교정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내가 미국 본토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발음을 정확히 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생각할 것이다. 훗날 내가 해외에서 생활을 하게 될 때,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며, 굳이 이를 숨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미국식 발음을 위주로 한 교육을 하기에 이 주류에서 벗어난 발음을 할 때,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오히려 한국식 영어 발음을 통해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기에 우리의 한국식 영어 발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