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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금 Sep 09. 2019

도둑맞은 애정을 돌려줘

이별로그 : 15일차

내가 오랫동안 못 잊었던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함께였을 때 나의 은밀한 가족사를 공유했다는 점이다. 스쳐가듯 사귄 애인들과는 나의 콤플렉스라고도 할 수 있는 가족 이야기를 깊이 나누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과 이별하면 짧은 슬픔과 허전함은 있었지만 그리움은 없었다.


 전 애인과 나는 서로의 가족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비슷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무살 무렵, 내가 기억하는 가장 내밀한 연애도 그랬다. 그 사람은 내 가족 문제와 그로 인해 생긴 나의 고장난 부분을 알고 있었고,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그런 연애를 할 때마다 나는 지긋지긋한 나의 진짜 가족 대신, 그들을 나의 새로운 가족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진짜 가족과 나 사이에 생긴 문제를 외면하고 새 가족인 애인들에게 온 마음을 쏟았다. 진짜 가족과 나 사이에 묻어뒀던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애인들과의 관계에서 종종 수면 위로 올라오곤 했다.


가령 나는 항상 상대의 애정에 목 말라 했는데 애정표현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다고 느껴지면 사랑이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어 용을 썼다. 어렸을 때는 억지를 쓰거나 헤어지자고 으름장을 놓으며 애인의 감정을 학대하기도 했다.


 20대 중후반을 넘기며 그 형태가 조금 세련되어졌다는 것만 빼고는, 안달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소중했던 관계는 대부분 여기서 파생된 문제로 끝났다.


 


  부모에 대한 원망이 컸다. 불안정한 엄마나 이기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어렸을때 경험한 신체적 언어적 폭력 같은 것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내 연애와 인간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나타나는 반복되는 문제들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건 고칠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천성적으로 애정에 쿨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선택한 적도 없는 내 가족 때문이고, 앞으로도 반복되는 건 아닐까.


어젠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게 내 잘못이 아니라면 나는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 앞으로도 나에게 올 모든 관계에서 이런 식으로 상처입어야 하는 걸까. 이제 겨우 삼십년 남짓 살았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실패하며 누굴 원망하고 살기엔 인생이 너무 길지 않나.


 가족에서 파생된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앞으로도 근원을 모르는 외로움과 애정결핍에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연애로 도망칠 것이다. 이건 빠져나가기 힘든 수렁 같은 게 아닐까.


 저녁에 미내플님의 책 '신경써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트라우마 파트를 읽으며, 예전에 어딘가에서 읽었던 문장인 "아름다운 어린시절은 없다"를 떠올렸다. 자기 분석과 객관화가 전문가 급인 미내플 같은 사람도 어린 시절에 패밀리 이슈가 있었고, 그것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인간관계에 억척스런 영향을 끼쳤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다들 비슷하구나. 다 자기만의 폐허가 있구나. 다만 이 트라우마를 묻어두느냐 두려워도 접근하느냐의 차이구나.


미내플은 양육으로 형성된 부정적인 방어기제를 극복하기 위해 '부모의 성장 환경 이해하기. 성인이자 개인으로서 자신의 의견 개진하기. 그것이 갈등으로 이어질 지라도 두려움 없이 응하기'와 같은 것들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나도 이제 내 문제를 해결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적당히 이해하고 적당히 단절하며 가족과 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중심을 잡아 갈 때다. 연애로 도망칠 때가 아니라.


 불안정한 부모와 예민한 여동생 사이에서 오빠는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생존 전략을 펼쳤다. 복종이었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은 결국 아들인데다가 착하고 교활한 오빠에게 향했다. 결국 나는 가족 중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크고 나서 나는 내 어린 시절의 도둑맞은 애정을 애인들에게 요구했다.


  그만 이 수렁에서 나오고 싶다. 나도 살아야지.


  이제 이 일들을 내 손으로 풀 때다.




이별 15일차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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