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금 Sep 11. 2019

이제 그 색은 안 어울려

이별로그 : 17일차


1. 즐거웠으니 됐다


 한동안 처박아 뒀던 핑크색 블러셔를 발랐다. 20대 초반에, 내가 21호 여름 쿨톤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을 때 자주 썼던 블러셔였다. 급하게 출근할 땐 몰랐는데 일하다가 거울을 보니 얼굴이 엉망이었다. 핑크색 블러셔는 얼굴 위에 창백하고 어색하게 동동 떠있었다.


 그 꼴을 보니 처음에는 속이 상했다. 한살이라도 더 어렸을 땐 핑크색이 이 정도로 겉돌진 않았었는데. 근데 갑자기 거울속의 내가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나중엔 갑자기 웃음이 났다. 나는 이제 이런 색을 얼굴에 올릴 수 없다는 걸 알고있다. 잠깐 잊어버렸었나 보다.


나는 20살이 아니다. 21호 여름 쿨톤도 아니고. 나는 스물 아홉이고, 나에게 어울리는 컬러와 스타일은 따로 있다. 어렸을 때 하던 게 안 어울리는 건 당연한 것이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잃은 것도 분명 있겠지만 새로 얻은 게 더 많다. 이를테면 내 외모의 장점을 그때보다 더 잘 알고있다는 것. 또 인터넷 쇼핑 실패를 거듭하며, 사진만 보고도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내는 일이 쉬워졌다는 것. 덕분에 20대 초반에는 한번도 듣지 못했던 '옷을 잘 입는다'는 칭찬을 이제는 자주 듣는다. 


그땐 그 색깔이 예쁘게 어울렸으니 됐다. 즐거웠다. 이제 나에게 어울리는 색은 그 색이 아니다.  



2. 노래를 듣기 시작했어 


 이별 노래가 무서웠다. 혹은 추억이 있는 노래가. 차에서 폴킴 노래들을 자주 들었었는데, 폴킴 사진만 봐도 무서웠다. 듣는 순간 전 남자친구가 떠오르고 이별한 첫 날로 감정이 돌아가버릴것 같았다. 어쩌다 실수로 재생 버튼을 누르기라도 하면 황급히 어플을 껐다. 무서웠다는 표현이 딱 맞다. 


1일차부터 어제까지 내가 듣는 건 뉴스와 경제방송, 연애 유튜버들의 이별 극복기가 전부였다. 특히 유튜버들의 이야기는 중독처럼 계속 찾아 들었다. 위로 받을 때도 있었고 감상에 젖을 때도 있었다. 특별히 이별을 극복하는 어떤 좋은 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들었던 이유는 내 이별이 특별하지 않다는 걸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람도, 여기 댓글 단 사람들도 다 이별했구나. 진짜 말 그대로 남들 다 하는 이별이구나. 그러니까 내 연애는 그렇게 특별했던 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런데 오늘 출근하며 갑자기 노래가 듣고싶었다. 늦은 만큼 다급하게 출근했고, 뛰는데 탄력받을 수 있게 신나는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59분 59초에 사원증을 찍는 데 성공했다. 나이스! 의기양양하게 자리에 앉아서 땀을 닦았다. 저 오늘 좀 되네요. 괜찮네요. 동료와 웃으며 이야기도 나눴다. 


이별 극복 어쩌고 위로 어쩌고가 없어도 내 아침 괜찮구나. 하나씩 하나씩 되찾아가고 있구나. 아침도. 노래도. 텐션도... 조금만 더 지나면 폴킴 노래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네 꿈을 꾸지만 괜찮다. 조금씩 더 괜찮아질 것이다. 






이별 17일차의 기록. 



이전 08화 도둑맞은 애정을 돌려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