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곳을 떠나서

내가 그린 큰 그림의 시작

by 사과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난 해외를 딱 한 번 가봤다. 중학교 1학년 때 가족여행으로 태국을 가지 않았더라면 기내식이란 것을 성인이 되고 나서야 처음 먹어봤을 것이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기말시험의 부담을 달래며 동기와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동기는 내게 물었다. "언니는 방학 때 뭐 할 거야?"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학교에서 계속 근로할 거야." 내 대답은 동기를 썩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동기는 아무렇지 않게 소감을 전했다. "언니는 너무 재미없게 사는 거 같아." 나는 그 말을 4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았다. 나는 내가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얻어내겠다는 마음을 기특히 여겼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재미없는 인생으로 보일 뿐이었다.




고등학교 친구 중 상해로 교환학생 파견을 간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에게 방학을 맞아 상해로 놀러 오라고 했고,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나는 친구의 제안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나 동기의 솔직한 도발에 반항심이 생겼다. "고등학교 친구가 상해에 있어서 다른 친구랑 놀러 갈까 생각하고 있어." 이미 뱉어버린 말을 책임져야 했고 결국 계획에도 없던 상해로 떠났다. 태국 이후로는 약 10년 만에 떠나는 해외여행이었다. 보호자 없이 비행기를 타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중국어라고는 'Ni hao'와 'laoshi'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떠난, 모험에 가까운 여행이었다. 40도에 가까운 기온을 견디며 주머니에 넣은 광고지가 녹을 정도로 땀을 흘렸지만, 결론적으로는 안전하게 그리고 즐겁게 다녀왔다.


상해의 랜드마크, 동방명주




상해는 충동적인 선택이었지만 교환학생은 오래전부터 계획해왔던 일이었다. 학창 시절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기 때문에 현지에 가서 영어를 배우고 싶은 욕심이 컸다. 하지만 집안 사정상 불가능했고 그러던 중 찾아낸 것이 바로 교환학생이었다. 대학교를 가면 무엇인가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했기 때문에 반드시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결심했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찾아본 것도 교환학생 정보였다. 누군가에게는 내 삶이 흥미로울 것 없이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나름 큰 그림이 있었다. 이제는 청춘의 상징이 되어버린 스펙 쌓기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일마저도 예전부터 계획했었던 큰 그림으로 보상받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마음껏 그려보았던 그림은 밑그림에서 엇나가기 시작했다. 영어를 전공하니 당연히 미국을 염두했는데 생각보다 학비가 비쌌다. 그렇다고 교환학생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학비와 기숙사비가 저렴한 곳을 찾아봤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곳이 스페인에 있는 바르셀로나자치대학교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나라를 가게 됐으니 비자 발급부터 쉽지 않았다. 아니, 미국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매번 고비를 맞을 때마다 '이러다 못 가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수십 번 했다. 하지만 무겁고 복잡한 절차가 끝나자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엄마께서는 내게 당부하셨다.

"유학 가서는 고삐 풀린 것처럼 방탕하게 생활하는 애들이 많다는데 넌 절대 그러면 안 된다. 외국애들이 한국애들을 어떻게 볼 지도 문제지만 잘못하면 돌아와서까지 문제가 될 수 있어."

나 또한 그 부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안전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라 남들보다 경계심도 많고 걱정도 많았다. 영화 '테이큰'을 보며 바르셀로나도 파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터넷으로 여행객과 유학생을 위한 주의사항을 탐독하며 준비했다.




해외로 나가면 미용실이 비싸다는 얘기를 듣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 어깨에 닿지 않을 정도로 자르며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어깨를 넘어있을 머리를 상상했다. 무엇보다 친구들을 만나느라 바빴다. 몇 년을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겨우 6개월 나가는 거지만 자주 봤던 친구들에게는 꽤 길게 느껴지는 기간이었다. 친구들은 반년 동안은 술 생각이 나도 나를 갑자기 불러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했다. 괜한 소리로 가지 말라는 친구도 있었지만 사실 난 친구들의 아쉬워하는 마음을 달랠 정신이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들떠있었고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는 것은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기대도 된다. 나는 다가올 시간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익숙한 곳의 소중함을 느끼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곳에서의 발견을 위한 시간이라는 것을.


2014-08-27_193818.jpg 바르셀로나로 떠나기 전 친구들과 함께 간 한강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