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기류(turbulance)

처음은 아름답지 않다

by 사과실

밤 아홉 시,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민이라도 가는 듯 엄청난 크기의 꾸러미를 끌며 공항으로 들어섰을 때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체크인 후 가족과 애틋한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여행 가는 기분으로 마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떠나는 자와 배웅하는 자를 가르는 자동문이 닫히고 나서부터 '혼자'라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면세점을 돌아볼 여유는 당연히 없었고 새벽 출발 비행기인데도 졸리지 않았다. 긴장한 채 가방을 더욱 끌어안았지만 최대한 긴장하지 않은 척 태연하게 굴었다. 나를 주시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아마추어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낯선 상황에서 순진한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나 혼자인 상황에서는 더욱.


운이 좋았는지 앞줄에 앉아서 다리를 뻗을 수 있었다. 9월 1일이었기 때문에 아직 날씨가 더웠지만 뭐가 그리 불안했는지 제공된 담요를 넓게 펴서 다리를 덮었다. 그렇게 짧은 바지를 입은 것도 아니었고 추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담요 하나로 내 모습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하나둘 들어오는 사람을 보면서 혼자 추측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교환학생을 가는 걸까? 큰 캐리어를 가지고 타는 걸 보니 위탁수하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많은 짐이 필요한 여정이라면 아마 나와 비슷한 목적으로 가는 거겠지.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승무원들도 지정좌석에 앉아 안정이 될 때까지 대기했다. 생각보다 요동의 정도가 심했고 오래 지속됐다. 무언가가 비행기의 머리를 때린 것처럼 갑작스레 쿵하고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불안한 마음에 승무원을 봤는데 놀랍게도 승무원은 무료하다는 얼굴로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이 정도는 그렇게 위험한 게 아니구나.'

기장의 그 어떤 안내 방송보다 승무원의 무료한 표정이 안심시키는 데는 효과적였다. 그때부터 흔들리는 기체는 흔들 요람이 되었고 곧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전히 승무원은 앉아 있었다. 오래 잠들지는 못했나 보다. 하지만 비행기는 안정을 찾았고 기내식이 준비됐다. 새벽 비행기에 경유까지 해야 하지만 그 항공사를 선택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째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었고, 둘 째는 기내식이었다. 평소 맛집을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기내식에는 이상하게 집착한다. 도시락처럼 깔끔하게 포장된 것이 기분 좋고, 한 접시 안에 디저트까지 담겨 있는 구성이 알차고 귀엽다고 생각해서다. 밥을 먹는데 옆 자리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은 아니었고 중년의 여자가 내 또래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어디 가요?"

"스페인이요."

혹시 나와 같은 곳을 가나? 집중력이 올라갔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사실 젊은이의 목적지가 궁금하지 않으셨다.

"나는 로마 가요. 우리 딸이 여기 승무원이라."

"그러시구나."

"대기업 다녔는데 자기는 여행 다니는 거 좋다면서 나오더라고요, 월급도 많이 받고"

누군가의 자랑을 들어주는 것보다 그 자랑에 대답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자랑을 들어주던 또래는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주제에서 멀어지려 노력했다. 그때 마침 등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자랑 속 주인공이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여쭤보러 온 것이다. 내가 바르셀로나로 가는 것이 결정됐을 때 엄마께서는 부러워하셨다. 여행을 많이 다니시는 편이지만 유럽은 가본 적이 없으셨다. 엄마의 부러움을 받았던 딸은 비행기 안 모녀를 보며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무슨 생각으로 스페인어도 못하면서 스페인으로 간다고 했던 걸까? 공항에 도착하자 생전 처음 보는 알파벳의 조합이 이어졌다. 그 상황에서 공항은 그저 넓고 낯선 사람이 많은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를 픽업하러 온 분을 빨리 찾아서 기숙사까지 가는 데는 문제없었다. 공항을 벗어나자 새로운 현실이 느껴졌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왔구나.'


IMG_20141217_172239.jpg 바르셀로나 엘프랏 공항, 도착했을 때는 정신이 없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도 못했다


사무실에서 열쇠를 받고 기숙사로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개강은 2주 뒤였고 내가 일찍 온 것이다. 기숙사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가장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 침대, 책상, 그리고 화장실 선반까지 가장 좋은 곳에 내 물건을 풀었다. 물건을 풀고 샤워를 하자마자 교환학생 오리엔테이션을 갔다. 거기서 나와 같은 학교에서 온 '하'를 만났다. '하'는 와이파이에 접속하는 법을 알려줬는데 타지에서 하루 일찍 온 것은 마치 한 달을 일찍 온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IMG_20141126_095025.jpg 바르셀로나자치대학 입구 조형물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기숙사 단지 안에 있는 유일한 가게로 가서 물과 곡물 비스킷을 샀다.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잠깐 누웠을 뿐인데 피곤했던지 바로 잠이 들었다. 새벽 비행기였음에도 기내에서 거의 잠을 자지 못한 탓이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해가 진 후였다. 어두워진 밖을 보니 덜컥 겁이 나 엄마께 보이스톡을 걸었다. 역시나,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났다. 서러울 것도, 아직은 힘들 것도 없었는데 무지의 공포와 낯섦이 눈물을 만들어냈다.

"처음 3일이, 그리고 일주일이 제일 힘들 거야. 일주일만 지나면 지금과는 달라질 거야."

눈물을 닦으며 다짐했다. 그래, 일주일만 두고 보자.

그리고 처음의 일주일이 바르셀로나에서의 내 생활을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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