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한국 학생을 만나다
슬프고 외로운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날이 밝으니 그 전날 밤만큼 우울하지 않았고,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일찍 일어나 9시가 되기 전에 바르셀로나자치대학의 IWP에 도착했다. 교환학생이라면 제일 먼저 IWP에 가서 도착을 알려야 했다. IWP는 International Welcome Point의 약자인데,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동양인 학생 2명이 와있었다. 둘은 친구처럼 보였는데 사용하는 언어를 엿들어보니 한국인은 아니었다. IWP의 직원은 친절했고, 내게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안을 보니 바르셀로나 시내 지도, 학교 지도, 할인쿠폰 등등 갖가지 정보가 들어있는 책자로 가득했다. 게다가, 개강 전까지 무료 스페인어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9월이지만 7월 같은 날씨와 더불어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일단 수업은 미루고 은행으로 가서 계좌를 만들었다. IWP를 나왔을 때가 10시를 조금 넘겼는데도 은행은 이미 북적였다. 거기서 '하'를 다시 만났다. '하'는 외국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말을 텄고 나는 옆에서 미소 정도만 지었다. 이것은 하루 더 일찍 도착한 자의 여유가 아니라 태어났을 때부터 쌓아온 성격의 차이였을 것이다.
그날 밤도 엄마와 보이스톡을 했지만, 첫날처럼 울지는 않았다. 다음 날은 수업을 듣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스페인어는 알파벳과 간단한 인사 정도만 아는지라 교수님이 스페인 사람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운 좋게도 내 옆자리에 한국 학생이 앉았다. 하얀 카라가 있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긴 갈색머리와 완벽한 눈화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말했다.
"한국인이세요?"
선크림만 바르고 나온 데다가 그마저도 땀으로 흘러내렸을 얼굴을 상상하니 내 몰골이 민망했다. 그렇게 '사'를 처음 만났고, 나는 '사'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후에 '사'에게 내가 느꼈던 첫인상을 얘기해주자 '사'는 놀리지 말라며 내 칭찬을 믿지 않았다. '사'는 한국에 있을 때 스페인어를 공부했다고 했다. 역시 나와 수준 차이가 컸고, 이게 과연 기초반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교재는 전부 스페인어로 되어 있었고, 나는 새로 알게 된 친구에게 의존했다. 이후 이 수업을 자주 결석했던 것은 내 수준보다 높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는 여름에 와서 마드리드를 여행한 뒤 바르셀로나로 왔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럴 수도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정직한 날짜에 도착했나 보다. 같은 학교에서 파견된 교환학생 말고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한국인 중 번호를 교환한 사람은 '사'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해나가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한시름 놓았다.
두 번째로 수업에 갔을 때 '사'는 다른 반에 있는 한국 학생들을 소개해줬다. 남학생 한 명과 여학생 두 명이었는데 모두 같은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한다고 했다. 우리는 수업을 들었던 건물의 옆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밥다운 밥을 먹었다. 그 메뉴가 아직도 기억나는데, 감자 브로콜리 샐러드와 목살 스테이크, 그리고 빵이었다. 가격은 7유로 정도였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식당이 교내 식당 중에서 비싼 편이었다. 그 날이 그 식당에서 밥을 먹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제대로 통성명을 했고 나이도 밝혔다. '사'와 '자'는 나와 동갑, '아'는 한 살 어렸고, '가'는 한 살 많았다. 식사를 하며 나는 아직 학교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친구들은 내게 한인마트를 같이 가자고 권했다. 그리하여 첫 외출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만났다.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고, 새로 만난 사람에게서 발견한 새로운 재미에 웃음이 났다. 한국을 떠나고 나서 이 얼마 만에 이루어지는 재밌는 대화인가?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교통권을 끊는 것도, 페로까릴을 타는 것도, 무엇보다 시내를 나가는 것이. '자'는 구글 지도를 이용해 마트를 찾았는데 나는 그때 구글 지도를 처음 이용해봤다. 그전까지 나는 얼마나 문명의 발전을 누리지 못했던 걸까? 나는 그곳에서 쌀과 보리차, 소금을 샀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니 왜 소금을 샀는지 이해가 안 간다. 굳이 한인마트에서 살 물건이 아니었으며 당장 소금 간을 할 재료도 없었는데. 요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남은 한 학기 동안 요리를 안 좋아하고 안 하면서도 혼자서 잘 먹는 법을 발견하는 재미로 살았으니까.
한인마트에서 장 보는 것을 마치고 역으로 가는 길에 또 다른 가게를 발견했다. 청과물 가게 같은 곳이었는데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한쪽 벽면 전체에 진열돼있던 보드카였다. '자'는 수많은 보드카 중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를 하나 집었다. '아'는 나를 보며 물었다.
"언니 혹시 술 좋아해? 잘 마셔?"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응."
'아'의 표정이 환해졌고, 알고 보니 모두 한 마음이었다. 우리는 보드카 한 병을 들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아직 룸메이트가 없는 내 방으로 가서 작은 파티를 위한 준비를 했다. 안주로는 떡볶이를 만들었는데 '사'가 메인 셰프였다. 하지만 생각처럼 맛이 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라면 스프 하나를 넣자 모두 다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었다. 그날의 저녁 식사로 인해 많은 것을 얻었다. 첫 째는 같이 놀 수 있는 친구, 둘 째는 이제 방에서 친구들과 편하게 놀 수 있다는 깨우침, 마지막으로 당장 프라이팬과 식기구를 구입해야겠다는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