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실 Jul 17. 2024

계약직 네 끼 - 선배는 신입이 뭘 모르는지 모른다

전설적인 업무 매뉴얼의 탄생 배경

재계약 이후로 다시 일 년이 흘렀다. 정신없는 3월과 한가로운 4월에 이어 날씨만큼 업무 강도도 높은 여름이 작년과 똑같이 지나갔다. 업무 스케줄은 작년과 같았지만 나는 작년과 달라져 있었다. 제법 직장인 티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입사 첫 주에는 사무실에 '내 자리'가 있다는 것에, 그 앞에 내 이름이 붙은 명패가 있다는 것에 설렜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출근하자마자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컴퓨터를 켜고 업무에 매몰되는 것에서 벗어나 9시 전까지 잠시 차를 마시고 출근길에 읽던 책을 마무리하는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제법 직장인이 되었다고 느끼게 된 것은 바로 엑셀 때문이었다.


대학생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한글과 ppt라면 직장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이메일과 엑셀이다. 외부와의 모든 소통은 이메일로 이루어지며 웬만한 자료는 엑셀로 관리하기 때문이다. 취업을 위해 컴퓨터활용능력검정시험 2급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자격증 공부를 할 때만 해도 취득 자체가 목적이었지 실제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회사에 들어와 보니 엑셀을 잘 다루는 것은 업무 효율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 보니 기본만 할 줄 알던 엑셀 활용 능력이 날이 갈수록 향상되었다. 엑셀 함수를 인터넷에 검색하지 않고 입력하고 엑셀의 기능을 두루 활용하는 나 자신을 보며 이제 직장인이 다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행정 업무라는 것은 어느 회사나 비슷하겠지만 어학당의 행정 업무에는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어학당의 수강생들을 직접 응대한다는 것이다. 'cs(고객 서비스)+행정'의 형태인 어학당의 행정실에는 온갖 서류와 지출 업무도 존재하지만 이메일이든 대면이든 고객응대 업무 또한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수강생들의 비자를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우리가 비자를 발급해주지는 않지만 비자 발급을 위한 서류를 준비해 주고 불법체류가 되지 않게 비자 만료 여부를 체크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담당한 언어권의 수강생 중 한 명이 불법체류를 코앞에 둔 상황이 발생했다. 관광비자로 와서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는데 바로 다음 날이 비자 만료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수강생을 행정실로 불러서 지금 당장 출국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마침 그날이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주말 동안 출국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된다고, 그럼 관광비자를 새롭게 받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21살의 수강생은 비자만료일에 대해서 전혀 몰랐는지 무척 당황스러워 보였다. 나는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비행기 티켓 사본을 받아놔야 했기에 티켓을 예매하면 내게 말해 달라고 했다. 행정실을 나간 수강생은 2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 가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 수강생을 찾으러 사무실을 나갔다. 수강생은 1층 계단에 걸터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서 스크롤만 내리는 손과 잔뜩 웅크린 어깨를 보고 있으니 내 눈앞의 사람이 21살이라는 것이 새삼 떠올랐다. 내가 말도 통하지 않던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떠났을 때가 23살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21살의 마음이 어떨지, 낯선 타국에서 맞이한 이 상황이 두렵지는 않을지 걱정됐다. 나는 수강생 옆에 걸터앉아서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는지 물어봤다. 수강생은 서툰 발음으로 아직 못했다고 했다. 나는 출국 사실이 중요하니까 일본 가는 가장 싼 티켓을 끊어도 된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그다음 주 월요일, 그 수강생이 다시 행정실을 찾아왔다.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도쿄바나나 과자를 들고.




어학당에서의 두 번째 일 년 동안에는 새로운 직원이 두어 명 들어왔다. 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직원이 있었다. 그전까지는 행정실에서 내가 막내였는데 나보다 어린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이 반가웠다. 여기가 첫 직장생활이라는 신입 원에게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말하며 열린 태도를 보여줬고 정말로 많은 것을 알려줬다. 내가 담당하는 업무가 아니더라도 막내 직원이 잘 몰라서 대답이 막히면 조용히 쪽지나 메신저로 적당한 답변을 보내 주기도 했다. 한 번은 막내 직원이 외근을 나가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었는데 처음 해보는 것이라 내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처음에는 말로 설명해주려 했으나 애매한 부분이 있어 결국 같이 나갔다.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막내 직원은,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아, 선생님 저번에 아이스크림 드시고 싶다고 하셨죠? 아이스크림 먹을까요?"라고 물었다. 마침 날씨가 덥기도 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는데 막내 직원이 내 것까지 계산하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하며 내 것은 내가 계산했다. 막내 직원은 오늘 같이 와준 것이 고마워서 자기가 사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말했다. "그런 걸로 사주지 마요. 그럼 앞으로 나한테 어떻게 편하게 물어보고 부탁하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내 말에 감동받은 막내 직원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은 좀 멋있었다.




일 년 동안 새로운 직원이 들어온 만큼 나가는 직원도 있었다. 친하게 지냈던 '앞자리 샘들'이 거의 다 나가고 이제 내 차례가 왔다. 최대 계약 기간인 2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11월이 되자 회사에서는 내 후임을 뽑는 공고를 올렸고 면접 날이 되었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여자가 들어와서는 내게 면접을 보러 왔다고 말했다. 면접 대기실을 알려주면서 생각했다, '저 사람은 내 자리에 앉는 걸 모르겠지.' 그날의 사건이 인연이었던 건지 내게 면접 대기실을 물어봤던 그 사람이 후임으로 뽑혔다. 시원시원한 외모와 성격의 후임은 나와 근무 기간이 한 달 동안 겹쳤고 그 한 달은 원활한 인수인계를 위한 부원장님의 새로운 방침이었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끌 줄 알고 마우스를 더블 클릭할 줄만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할 수 있을 정도로 기초부터 자세히 적힌 업무 매뉴얼을 만들었다. 사실 나는 입사 첫 달부터 업무 매뉴얼을 작성했다. 나중에 일이 익숙해지면 신입의 감을 잃어버릴 테니 그때 가서 매뉴얼을 작성한다면 인수인계를 할 때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후임은 내가 만든 매뉴얼을 보면서 한 달 동안 일을 배웠는데 매뉴얼이 돌고 돌아 내가 관둔 후에도 몇 년 동안 사용됐다고 하니 작정하고 쓴 보람이 있다.




업무 매뉴얼을 일찍부터 쓴 이유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최대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2년이기는 하지만 그전에 이직에 성공해서 회사를 나가고 싶었다. 친하게 지냈던 앞자리 샘들 중 절반이 원하던 곳으로의 이직에 성공해서 중도 퇴사를 했기 때문에 나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 매뉴얼을 준비해 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설적인 업무 매뉴얼을 남겨 놓은 채 계약 기간 2년을 전부 채우고 나왔다. 근무 마지막 주의 어느 날, 차장님 대신 발령받은 대리님이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대리님이 어학당으로 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따로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은 딱 하나를 의미했다, 퇴직금 서류에 서명하는 것.


어학당에서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날, 내 송별회를 위해 행정실 전체가 점심회식을 나갔다. 장소는 내가 평소 좋아하던 파스타 가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가게가 체인점인 줄 몰랐기 때문에 어학당을 관두면 다시는 못 먹을 메뉴라고 생각했다. 글루텐 프리를 지향하며 단호박을 주재료로 한 이탈리안 파스타와 피자를 파는 곳이었다. 평소에도 구황작물에 환장하는 나는 진짜 단호박에 담아주는 수프에 감탄했다. 가게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고민할 필요도 없이 부드럽고 진한 노란색, 정확히 말하면 단호박색의 크림 파스타를 주문했다. 이곳의 음식은 받자마자 먹기에는 유독 뜨거웠기 때문에 적당히 살살 뒤집으며 열기를 식혀줘야 했다. 푸짐한 파스타를 먹을 때까지만 해도 마지막 근무 날이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근무 마지막 날에는 오후 반차를 썼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바로 퇴근하는 일정이었다. 송별회 점심회식이 끝나고 다들 나를 캠퍼스 정문까지 바래다줬다. 2년 동안 정이 많이 들었던 건지 이직을 해야 한다는 생각 한편에는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제법 일이 잘 맞았고 적당한 보람도 느끼고 있었는데. 퇴직금 서류에 서명하던 날, 대리님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선생님 일 너무 잘하시는데, 진짜 붙잡고 싶네요."라고 말했다. 그러다 잠시 한숨을 쉬더니 "그렇지만 그건 욕심이죠. 선생님은 더 좋은 자리에 정규직으로 가셔야죠."하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잡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에 콕 박혔다. 그렇다, 이제는 정규직으로 일할 때다.

이전 07화 계약직 세 끼 - 재계약은 어려울 것 같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