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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Jul 10. 2024

계약직 세 끼 - 재계약은 어려울 것 같아요

다음 일 년을 베팅하다

날씨만큼 나른했던 4월이 지나고 일 년 중 가장 바쁜 여름이 찾아왔다. 국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어학당에서는 보통 일 년 동안 계절에 맞춰 4학기 체제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그리고 그보다 짧은 기간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렇게 두 가지 형식의 프로그램이 어학당의 주축을 이루어 정기적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어학당에 따라 모 대학과 협력하여(라고 말하고 실상은 모 대학을 대신하여)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기도 다. 내가 일했던 곳의 경우 앞서 말한 프로그램을 전부 운영했으며 이에 더하여 여름 방학 기간에는 여름 특별 과정을 별도로 진행해서 더 많은 수강 유치했다.


특별 캠프의 경우 연초부터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5월이 되어서야 개설 여부를 알 수 있었다. 부원장님과 차장님이 특별 프로그램 개설과 관련해서 회의를 다가 앞자리 샘들 중 한 명을 부르면 우리는 새로운 업무를 주려는 건가 싶어 덜컥 겁을 먹었다. 이미 다른 학기보다 늘어난 수의 수강생 때문에 뭔가를 더하지 않아도 여름 학기는 바쁜 법이었다. 그런데 거기다 새로운 업무까지 더해 버리는 것은 한도 초과였다. 문제는 여름 특별 프로그램의 3분의 2를 나 혼자 단독으로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뀐 후에도 내 업무는 줄어들 줄 몰랐다.




내가 일했던 첫 해 여름, 부원장님이 바뀌었다. 부원장이라는 직위는 어학당 전체를 통틀어 서열 2위이자 실무적으로는 최고 결정권자였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이고 실무자들에게도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바뀌기 전의 부원장님은 실무자들을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했다. 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일일이 정해줬는데 심지어는 메일에 들어갈 안부 인사의 정확한 워딩까지 읊어 줄 정도였다. 그러나 새로 온 부원장님은 정반대였다. 굵직한 결정 사항만 전달할 뿐 세세한 부분은 실무자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했다. 실무 회의에서 늘 배제되었던 우리는 새로운 부원장님의 발령 이후 회의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다른 스타일의 두 부원장님에 대한 평가는 같은 사무실 내에서도 엇갈렸다. 이전 부원장님 스타일에 익숙해져 있던 직원들은 새로운 부원장님의 스타일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 '자율권'이라 불리는 범위의 일들을 '업무 과중'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일의 양과는 별개로 계약직이라는 근무 형태가 가진 특징 때문이었다. 계약직은 최대 2년까지만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업무의 연속성이 당연히 보장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자신이 담당한 일을 '내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잠깐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자율권'은 자신의 직위를 넘어서는 책임이었다.




사실 나는 새로운 부원장님의 스타일과 잘 맞았다. 그전까지는 부원장님의 말과 글을 전달하는 로봇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다 새로운 부원장님의 부임으로 내 말과 글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면서 내가 누군가의 대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책임감이 커지기는 했지만 오히려 적절한 책임감은 능률을 향상하는 역할을 했다. 부원장님의 업무 스타일과 나의 성향이 잘 맞는다는 것을 나뿐만 아니라 사무실 전체가 느끼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부원장님이 나를 신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사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뿌듯한 일이지만 그만큼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내 업무 스케줄은 한도 초과를 넘어선 지 오래인 어느 날이었다. 부원장님과 다른 직원 둘이서 야근을 하며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러다 부원장님이, "처음 해보는 프로그램이라 좀 잘하는 사람이 맡았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하며 나를 콕 집자 다른 직원이 "그럼 그 선생님 진짜 죽어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대화 속 다른 직원이 자신이 날 살렸다며 들려준 것이다. 그 덕분에 이제 가까스로 업무의 홍수에서 헤엄치는 법을 터득했던 나는 예상치 못한 물살이 밀려드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 년을 보내다 보니 겨울이 되었다. 일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던 어느 날 갑자기 차장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점심 같이 먹을 수 있어요?' 점심식사는 고사하고 차장님과 단둘이 있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차장님은 일 년 동안 내가 너무 고생했다며 밥 한 끼 사주고 싶다고 했다. 차장님은 자신이 잘 아는 맛집으로 날 데려갔다. 대학 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내가 주로 점심을 먹으러 가던 방향과는 반대쪽이라 처음 가보는 식당이었다. 가게 분위기만 봐도 가격이 좀 있을 거라 짐작될 정도로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음식을 주문하자 나는 테이블을 세팅했다. 사실 사회에서 만난 어른과 단둘이 식사하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은 어렵고 긴장되었다.



차장님은 자연스럽게 최고난도였던 여름 얘기를 꺼냈고 업무가 너무 많아서 걱정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일을 잘한다는 칭찬도 덧붙였다. 나는 감사하다며 미소를 지었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음식이 나왔다. 음식을 보자마자 첫째로 고급스러운 플레이팅에 놀랐고 둘째로는 퀄리티에 놀랐다. 부드러운 고기와 이전에는 먹어본 적 없는 소스의 조합이 입안을 풍성하게 했다. 아껴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어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씹었다. 식사가 끝날 때쯤에서야 차장님은 식사 자리의 의도를 드러냈다. 내가 업무가 너무 많아서 업무를 조정하게 됐으며 내년부터는 업무 일부가 덜어질 거라고 말했다.


일이 줄어든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야 마땅한데 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내가 이곳에서 일하기로 한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업무 경력을 쌓기 위해 그리고 업무에서 영어를 쓸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차장님이 말한, 조정된 업무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일은 전부 배제되어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업무에서 영어를 쓰지 않는다면 의미가 있을까?' 결국 나는 무리수일 수 있는 조건을 걸고 베팅했다. "차장님, 내년에 영어 쓰는 업무를 하지 못하면 재계약은 어려울 것 같아요." 나는 어학당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힘들긴 했지만 나름대로 보람도 있고 즐거웠다. 고용 연장의 조건이 다른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 쓰는 업무를 하고 싶다는 것임이 잘 전달되기를 바랐다.




재계약의 열쇠는 고용주가 쥐고 있다는 상식에서 벗어난 발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 잘한다는 소리 좀 듣고 부원장님의 신임을 얻었다는 생각에 선을 넘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단은 그렇게 질러놨지만 그날 오후 차장님이 부원장님과 단 둘이서 조용히 회의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러다 잘리면 어쩌지? 진짜로 재계약이 안 되면 어쩌지? 그러고 얼마 후 부원장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직감적으로 재계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원장님 옆에 앉았다.


부원장님은 내게 업무분장표를 보여주며 내년에 신입직원을 뽑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입직원이 오면 내 업무 중 일부를 맡길 건데 어떤 업무를 주고 싶은지도 물었다. 내게 업무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 것이다. 겉으로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꼭 쥐고 있고 싶었던 '영어 쓰는 업무'는 그대로 두고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 할만한 일을 골라 넘겼다. 부원장님은 "그 정도면 되겠어요?"라고 한 번 더 확인한 후 그대로 하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재계약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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