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4월, 가장 생기 넘치던 그 시절
대학 부설 어학당에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서류 한 장에 질문 하나가 달리던 새내기 시절을 졸업하고 간단한 업무는 혼자서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얼마 후 새 학기가 시작하는 3월이 되었을 때는 일 년 중 손꼽히는 굵직한 업무들을 소화해 내면서 제법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드디어 4월이 왔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살랑이는 바람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설레는 봄의 한중간이.
다른 어학당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일했던 곳의 4월은 일 년 중 가장 한가한 시기였다. 봄학기가 안정을 찾고 여름학기와 여름방학 단기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전 잠깐 즐길 수 있는 휴식기였다. 출근과 동시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업무에 몰두하던 때가 오래전처럼 느껴졌고 퇴근 시간을 들쭉날쭉하게 만들었던 야근도 전부 사라졌다. 가끔은 나른한 오후를 견딜 수 없어서 동료 선생님들과 편의점으로 간식을 사러 가기도 했다.
어학당에서 일명 ‘앞자리 샘들’로 불렸던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사무실의 책상 배열은 정확히 두 줄이었는데 부원장님 책상을 제외하고 모두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출입문과 바로 마주 보는 앞줄은 영어권, 중어권, 일본어권을 담당하는 계약직 직원 자리였다. 그래서 나를 포함해 앞줄에 앉아 있는 계약직 직원들을 통틀어 ‘앞자리 샘들’이라 불렀다. 우리는 나이가 비슷한 데다 성격도 무난해서 쉽게 가까워졌다.
회사 자체 메신저 프로그램 운영이 종료되면서 우리는 대체재로 네이트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무를 담당하는 앞자리 직원들끼리 편하게 업무를 공유하려던 것이 단체 대화방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업무용 파일과 일정만 오고 갔지만 점차 점심식사 메뉴를 고르고 서로의 춘곤증을 깨워주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뒷자리 선생님 중 한 분이 사무실의 적막을 깨보고자 켠 라디오에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서로 먼저 노래 제목을 맞추려고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가 부산스럽게 들리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한 사무실이었지만 온라인 대화방은 늘 점심 식사 메뉴로 수다스러웠다. 앞자리 샘들 중에는 어학당의 모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있었고 대학원에 재학 중인 사람도 있어서 주변 맛집 정보에 빠삭했다. 가기로 한 맛집이 사무실에서 조금 멀면 12시가 되자마자 도어 투 도어로(사무실 문을 나서는 것부터 다시 사무실 문으로 들어오기까지) 1시간 안에 점심식사를 끝내기 위해 종아리가 얼얼할 정도로 빠르게 걸어가기도 했다.
나의 공식적인 첫 사회생활은 인턴이었지만 사회생활의 맛을 제대로 본 것은 어학당에서 일하던 때였다. 그전에는 먹어본 적 없는 다양한 음식들, OOO 가정식이라 불리는 정갈한 한상 차림을 비롯해 처음 맛보는 세계 각국의 음식들을 거의 날마다 즐겼다. 캠퍼스에 있는 학생 식당만큼은 아니었지만 학교 주변 역시 물가가 저렴한 편이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아직 커피 맛을 몰라 달달하고 차가운 밀크티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오던 그 시절의 내게는 소소하면서도 즐거운 재미가 있었다. 우리의 맛집 탐방은 점심식사로 끝나지 않고 퇴근 후로도 이어졌다. 퇴근하고 나서 안주가 맛있다는 이자카야를 찾아가기도 하고 맥주 한 캔 사들고 무작정 한강으로 향하기도 했다. 어학당이 첫 직장이었던 우리는 직장동료와 친구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지 않았다. 우리는 그 관계를 넘나들면서 우정만큼 진한 무언가를 만들어 나갔다.
그 시기가 내 삶의 4월이었다. 이제 막 피어나는 계절, 생기가 돌기 시작해 아름다운 바로 그 시기. 누군가에게는 그 시기가 대학생 때일지 모르겠지만 나의 대학생활은 생기와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아르바이트를 2~3개씩 하느라 일주일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한 적이 많았다. 내게 공강일과 주말은 '아르바이트하는 날' 또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날'을 의미했다. 그러던 내가 직장인이 되고 나서 제대로 된 휴일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주말 내내 쉬는 일상이 당연해졌다.
직장인이 되어 가장 좋은 점은 아르바이트로 벌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입이 정기적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계약직 직원의 월급이니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수입과 지출을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적은 월급이었지만 그 돈으로 학자금 대출도 갚고 친구들과 해외여행도 가고 저금까지 했다. 한 마디로 돈 모으고 돈 쓰는 재미로 20대 중반을 보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생기 넘치던 때가 언제인지 생각하면 지금도 그때를 떠올린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부족하다는 생각 없이 살았던 그때를. 지금은 분명 그때보다 더 안정적이고 풍족해졌음에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며 가끔은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내가 욕심이 많아진 걸까? 아니면 세상이 더 팍팍해진 걸까?
갈수록 어려워지는 취업에 대한 해답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이라는데 어째서인지 그게 취직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 분명 세상이 더 팍팍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세상만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만만치 않게 팍팍해졌다. 주말 아침에 어떠한 부담도 없이 침대에 누워있을 수 있다는 것에 감동받던 나는 지금 눈이 높아진 걸까 순수함을 잃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