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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20. 2022

전혀 친하지 않은 동네로의 이직

남산 타워가 보이던 곳에서 잠실 타워가 보이는 곳으로

경기도 신도시에서 20년을 넘게 살았지만 꼬박꼬박 서울 나들이를 즐겼기 때문에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보다 서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해도 자기가 사는 동네만 친숙한 법. 서울 곳곳을 알려면 노력이 필요한 것은 어디를 살든 마찬가지다. 나는 20대의 7할 동안 대학생 때는 공강 시간을 활용하고 직장을 다닐 때는 주말을 활용해서 대중교통으로 닿을 수 있는 서울을 탐방했다.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홀로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니 잘 몰랐던 동네에도 정이 들었고 지도를 보지 않고도 길을 잘 찾을 수 있었다.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집에서 가까운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마련이다.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으면 더 좋았고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이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경기 북서부에 사는 도민으로서 정감이 가는 서울 동네를 꼽자면 한강의 북쪽이 대부분이다. 한강의 남쪽으로는 마음이 가지 않았고 발길 역시 마음 가는 곳을 따라갔다.




놀러 가는 길도 이 정도였는데 매일 가는 학교나 직장은 오죽했겠는가. 다행히도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는 걱정이 덜했다.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대학교가 한강의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대학은 지역이 아니라 성적에 맞춰서 가는 것이 아니던가. 중고등학교도 아니고 집이랑 가깝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거리를 고민하기보다는 성적을 올리는 데 열중했다.


다행히도 운이 좋아서 우리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통학 시간으로 따지면 한 시간이 넘는 먼 거리였지만 수도권에 살면서 그 정도의 여정은 늘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스럽지 않았다. 앞서 말했다시피 대학이라는 곳은 일단 합격 자체만으로도 큰 기쁨이기 때문에 '통학시간이 뭐 대수인가'라는 긍정적인 마음뿐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남산 타워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남산 바로 아래 있는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등교를 할 때마다 남산 타워를 볼 수 있었다. 미세먼지 농도에 따라 타워의 색이 바뀌던 때라 미세 먼지가 얼마나 심한 지를 알고 싶으면 고개를 돌려 남산 방향을 보기만 하면 되었다. 가을에는 캠퍼스랑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남산 단풍을 구경하기도 했다. 4학년이 되어 취업 준비로 마음이 무거울 때면 남산 타워 바로 밑에서 서울을 내려다봤다. 커플들이 난간에 자물쇠를 달며 사랑을 맹세할 때 나는 '이 넓은 서울에 내가 설 자리, 앉을자리 하나 없겠냐'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얻었다.


습관처럼 불렀던 남산 타워의 정식 명칭이 N서울타워라는 것을 알게 됐을 무렵 남산 타워 라이프의 제2막이 시작되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제 이렇게 자주 남산 타워를 볼 일은 없을 거라며 아련하게 타워를 바라봤지만 그랬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제까지 다녔던 직장들은 모두 남산의 그늘 아래 있었다. 봄이면 벚나무로 듬성듬성 분홍빛을 띠는 남산을 보며 나들이를 꿈꿨고, 가을에는 남산의 붉은빛에 감탄하며 정취를 즐겼다. 점심시간마다 사무실을 나와 식당으로 가는 길이면 항상 남산 타워가 내 뒤를 우직하게 지켜주었다.


'남산 타워 라이프'는 내가 수도권 북서부의 신도시로 이사를 올 때부터 정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통근 거리를 생각하면 한강 남쪽에 있는 회사에 지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채용 공고를 훑어보는 것이 입사 지원의 첫 번째 단계라면 두 번째 단계는 회사 주소를 검색한 뒤 교통편을 검색해보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강남 3구'는 부동산 시장에서는 인기가 많을지 몰라도 나만의 취업시장에서는 눈길조차 받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강남구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옛날부터 가고 싶었던 회사였기에 집에서 먼 것을 알았음에도 지원을 해봤던 건데 합격해버린 것이다. 합격 통지를 받고 입사 서류를 준비할 때만 해도 당연히 자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하나둘씩 쌓이면서 자취 생각을 덮고 서울을 가로지르는 통근길을 선택했다.




점심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남은 시간 동안 주변을 산책할 때면 아직도 내가 강남구로 출퇴근을 한다는 사실이 낯설다. 이제까지 몸과 마음이 뜻을 함께하여 거부해왔던 곳을 매일 같이 오게 될 줄이야. 남산 타워가 늘 지켜줬던 내 뒤를 이제는 잠실 타워가 지키고 있다. 인간이 하늘에 닿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 첨탑을 높이 올렸던 것처럼 강남의 빌딩들은 좁은 땅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빌딩을 높였다. 인간의 욕망은 예로부터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올리는 것으로 발현되었다.


어두컴컴한 창밖이 이어지던 출퇴근길의 지하철은 한강을 만나면서 빛을 받는다. 그럴 때면 나도 고개를 들고 창밖으로 펼쳐진 한강을 본다. 아직은 친하지 않은 동네에서 익숙한 동네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한강. 매일 똑같은 풍경인데도 질리지 않고 볼 때마다 설렌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한강을 지나고 꼬박 10시간 반이 흐르면 도시의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강을 다시 만난다. 한강의 아름다움이 낯선 동네를 오가는 지친 마음을 다독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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