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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27. 2022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것이 사치가 되다

급여보다는 복지에 중점을 두는 실수

처음 취업을 준비할 때부터 공공기관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 교환학생을 다녀온 것 때문에 필수 과목 이수가 뒤로 밀려 한 학기를 연장했는데 그 때문에 계획보다 졸업이 늦어졌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학기 연장이나 졸업 유예가 흔했고 취업에 유리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간주되는 분위기라 흠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기를 연장했다고 해서 나이가 드는 것까지 늦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은 조급했다. 늦어도 졸업과 동시에 취직에 성공하겠노라 다짐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취업이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다 운 좋게도 공공기관의 인턴으로 합격했고 졸업식을 3주 앞둔 날부터 출근했다. 그때만 해도 공공기관 인턴 합격이 행운인 줄로만 알았다.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제대로 된 사회생활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전형적인 직장인의 삶을 처음 맛본 것이다. 점심시간에 휴대전화와 지갑만 든 채 빌딩을 빠져나가는 직장인 무리에 속한 것이 뿌듯했다. 회사 선배들은 생각보다 사소하고 반복적인 업무에 불만스럽지는 않은지 물었지만 나는 업무에 대해서 만족도 불만족도 없었다. 다수의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업무의 환상과 실재 사이의 괴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지'보다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에 중요성을 두었다.


내가 일했던 공공기관은 유독 여자가 많은 직군이었고 그만큼 여성에 관한 복지 혜택을 실제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2년 간의 육아 휴직 후 복직한 직원이 우리 팀에 있었고 아무리 바쁜 기간이더라도 육아기 단축 근로를 쓴다고 눈치 주는 사람이 없었다. 휴가를 쓰는 것은 직원의 권리라는 개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화였고 복지 혜택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면 공공기관이라 그럴 수 있는 거라며 사기업은 다르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후로 대학교육기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했는데 대학기관은 다른 사기업보다는 복지혜택과 관련해서 사정이 나았으나 공공기관만큼 좋지는 못했다. 이미 공공기관에 맞춰져 높아진 눈 때문에 '라떼는 말이야'로 무용담을 늘어놓듯 인턴 시절을 추억했다. 계약이 종료됨과 동시에 직장생활은 멈췄고 구직활동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왕이면 정규직을 원했지만 적어도 잘릴 날짜가 정해져 있는 계약직은 피하자고 결심했다. 그때만 해도 사기업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이미 공공기관이 주는 혜택의 단맛을 봤기 때문에 손과 눈은 공공기관으로 향했다.


사회 초년생으로 발을 디딜 때부터 '어떤 일을 하는지'보다 '일을 한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비록 내가 원하던 직무는 아니었지만 '공공기관에서 일을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끝에 국립박물관에서 공무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공무직은 '공공기관의 무기계약직'의 줄임말로 근무기한이 정년까지 보장되는 계약직이다. 공무직의 경우 기관에 따라 처우가 상이한데 일명 '메이저급' 공공기관의 경우 공무직과 정규직의 처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 임금도 동일하고 복지도 동일하지만 승진이 없는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국립박물관의 공무직 처우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다. 이것은 내가 몸 담았던 박물관뿐만이 아니라 다른 국립 박물관도 같은 실정이다. 승진 기회는 당연히 없고 최저 임금에 딱 맞춘 급여에서 인상도 없다. 심지어 공무직을 은근히 무시하거나 견제하는 회사 분위기가 가소로웠는데 정규직과 공무직의 채용 절차가 전혀 다르지 않은 데다가 현저히 떨어지는 업무능력을 보여주면서도 개관 멤버라는 이유로 자리를 꿰차고 있는 무능력한 정규직 때문이었다.


정규직이더라도 직급이 낮고 연차가 적은 평사원의 경우에는 급여가 공무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정근수당이 붙고 승진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있지 않냐고 정규직과 공무직 사이에 선을 그었다. 정규직인 대리급의 한 남자 직원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어버린 선을 지울 생각은 없었다. 그 남자 직원의 집안이 굉장히 부유하다는 소문이 돌자 한 직원이 말했다. "여기서 계속 일하려면 집이 잘 살아야 해." 그때까지만 해도 그 말이 비약적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꼭 그래야만 하겠어? 정규직이니까 버티는 거겠지.' 어쩌면 그건 공무직에 대한 콤플렉스였는지도 모른다.




3년이 넘어도 월급이 전혀 오르지 않던 공무직을 관두고 나왔을 때는 속이 후련했다. 이직을 하지 못하더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보기 좋게 다른 공공기관의 정규직으로 합격한 것이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드디어 안정적인 직장을 얻었다. 합격했다는 기쁨과 새로운 직장에 대한 설렘, 정규직이 되었다는 안도와 함께 월급도 오를 거라는 기대로 마음이 들떴다. 출근한 첫 주에 계약서를 받자마자 가장 먼저 연봉부터 살폈다. 이제까지 일했던 경력을 인정받아 기본급보다 조금 더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높은 금액은 아니었다. 수익사업을 하는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정부의 예산을 쓰는 문과 성향의 공공기관 초봉은 턱없이 낮다. 내가 선택한 공공기관들만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복지 혜택을 급여로 환산한다는 마음으로 공공기관을 선택했다. 결혼을 할지 안 할지 아이는 낳을지 안 낳을지 모르지만 출산 및 육아 혜택이 좋은 것도 마음에 들었으며 복지와 관련해서 이제까지의 기관들보다 더 좋으면 좋았지 못한 것은 없었다.


입사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청첩장 모임을 한 번, 2주가 지났을 때 또 한 번의 청첩장 모임을 갔다. 두 번의 청첩장 모임을 다녀온 후 지금까지 가져왔던 가치관이 흔들리고 이제까지 쌓아 온 경력을 후회했다. 화근은 청첩장 모임에서 친구들과 나눈 대화였다. 스타트업 기업의 팀장으로 있는 친구는 팀원들이 자꾸 회사를 나가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연봉에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싶다며 공개한 연봉은 신입 2년 차 기준으로 5천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반응으로 볼 때 5천은 그리 놀라운 액수가 아니었다. 나는 분위기에 맞춰 놀란 표정을 숨겼다.


두 번째로 간 청첩장 모임은 더 최악이었다. 원래도 뽐내는 것을 즐기는 친구라 이미 인스타그램이 자랑으로 가득하면서도 아직 하고 싶은 자랑이 남았는지 만나자마자 근황인지 자랑인지 모를 얘기를 늘어놓았다. 자신과 남편이 각각 집을 사서 혼인신고를 하면 세금이 너무 많이 나올 것 같아 신고를 미뤘다는 얘기, 프러포즈링으로는 다이아몬드가 떡하니 박힌 반지를 받고 웨딩 밴드로는 명품 브랜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 결혼 전에 명품 백을 선물 받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결혼하자마자 명품 매장 앞으로 남편을 불렀다는 얘기를 소리 높여 가며 떠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은 6명이었는데 그중 공공기관에 다니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직군이 다양해서 프리랜서 한 명, 중학교 교사 한 명, 외국계 기업 한 명, 대기업 한 명이 있었다. 자랑을 늘어놓은 친구와 친구의 남편이 어느 회사를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벌이가 좋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한 시간 동안 지속된 자랑에 공감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중 두 명은 적극적으로 공감하거나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두 명의 친구는 나와 시선을 교환하며 당황스러움을 주고받았다. 나만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안도한 것도 잠시, 집으로 오는 동안 허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친구의 자랑에 공감할 필요가 없음을 머리는 알고 있었다. 친구가 늘어놓은 궤변이 허영심으로 가득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지배한 것은 이성적인 머리가 아니라 기죽을 대로 기죽은 마음이었다.


박물관에서 일하던 시절, 집이 잘 살아야 공공기관에서 계속 일할 수 있다는 직장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내가 공공기관에서 일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결정이었다. 복지보다는 급여에 무게를 뒀어야 했는데 복지에 중점을 두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한편으로는 억울함 때문에 마음이 먹먹했다. 나도 열심히 살았고 지금까지 해낸 일 중 쉬운 것은 없었다. 그런데 왜 보상이 이렇게나 다른 걸까?


결혼 전에 못 받았던 명품백을 받기 위해 기를 쓰고 명품 매장으로 남편을 불러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명품백에 관심을 끊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사실 그 친구와 친구의 남편은 벌이가 되니까 굳이 명품백을 마다할 필요가 없다. 진짜 사치를 부린 사람은 바로 나였다. 이제 와서 공공기관의 복지와 워라밸을 포기하고 치열한 사기업에 들어가는 것은, 들어가기도 힘들겠지만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불만을 가다듬고 지금 삶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언제 쓸지 모를 복지를 위해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급여를 포기한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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