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암환자로 살아가는 법: 영화 <미스 유 올레디>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함께한 절친이 암환자가 되어 당신 앞에 나타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굳이 묻지 않아도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영화 <미스 유 올레디(miss you already)>(2015)는 그 고통의 상황을 겪는 두 여자, 제스(드류 베리모어)와 밀리(토니 콜렛)의 이야기이다. 겉보기에는 감동을 자극하는 뻔한 우정 영화로 보일지 모르지만, 특별하게도 이 영화는 여성이 '암환자', 특히 '유방암 환자'로 살아갈 때 겪게 되는 특수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
*본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제스와 밀리는 첫사랑부터 첫경험까지 모두 함께한 절친이다. 어릴 적 만난 둘은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밀리를 우선으로 각자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 상태다. 나름 평화롭게 이어가던 둘의 일상은 밀리의 '암 선고'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암 선고를 받은 후 밀리는 가장 먼저 제스에게 연락을 했고, 유쾌한 제스의 성격 덕에 항암 치료 과정은 무사히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인생은 그리 쉽지 않기에 밀리는 결국 두 유방을 절단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애써 잘 견디는 것 같았던 밀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위태롭게 흔들린다.
영화에서 밀리의 고통은 치료 과정이나 투병 생활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보다도, '암환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 고통을 보여주는 첫 번째가 바로 '삭발'이다. 삭발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떠올리는 '암환자의 대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암환자에게 삭발이란 그냥 머리카락을 미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질병을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과정이자, '암환자'라는 정체성을 사람들에게 가시화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썩 유쾌하거나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자신의 삶이 이전과 전혀 달라졌다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그동안 지켜왔던 '나'라는 정체성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고통스럽다.
특히 '보여지는 모습'이 사회적으로 중시되는 여성들에게 이는 더욱 문제적이다. 자신을 화려하게 꾸밈으로써 자존감을 확보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아왔던 밀리에게 머리카락을 민다는 것은 일종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이었을 것이다. 밀리는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변화를 숨기기'를 선택한다. 가발을 쓰고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화려한 옷으로 자신을 꾸미며, 회사에도 꿋꿋이 나가 밝게 웃어 보이는 밀리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투쟁의 대상은 암 세포나 치료 약물이라기 보단,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새로운 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전부라고 여겨졌던 외모와 사회적 위치, 타인에게 받던 인정들이 모두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다시 '나'를 정립하고 만들어 나갈 방법을 찾아가는 투쟁인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암환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나와의 관계'에 있어 같은 문제를 겪는다. '아픈 나'도 '나'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있는가? 삶을 뒤바꿀 질병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나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밀리가 겪는 두 번째 문제는 '성역할'이다. 앞서 말했듯, 여성들에게 '암환자가 된다'는 것은 '특별한 어려움'을 겪게한다. 여성은 환자가 되어서도 '여성'으로 존재하길 요구받는다. 밀리 역시 환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커리어우먼으로, 엄마로, 아내로 남아있기를 요구받는다. 아이들을 챙겨달라는 밀리의 부탁에 '왜 아프다고 얘기 안 했어?'하고 반문하는 남편의 모습은 그 요구를 잘 보여준다. 밀리의 가족들에게 '아픈 것'과 '엄마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구분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며, 밀리는 '환자인 나'를 받아들이는 일을 잠시 미루어두고, 본래 수행하던 역할들을 해내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유방 절단 수술을 겪게 되면서, 밀리는 역할 수행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달라진 몸을 밀리도, 밀리의 남편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부관계는 소홀해진다. 바텐더 남직원에게 자신의 가슴을 내보이며 '이 가슴을 보면 만지고 싶나요?'하고 묻는 밀리의 모습은 '여성'으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이때 '여성으로 남는다'는 것은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성'을 의미한다. 밀리는 남편과의 원활한 성관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괴로움을 느낀다.
이러한 밀리의 고통은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질병과 환자를 바라보는 사회 인식의 문제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질병을 겪는 환자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들에게 '그래도 할 일은 하라'는 말을 동시에 전하기도 한다. 종종 환자를 이기적인 존재로 그리거나 사회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배제하는 일들이 이에 해당한다. 아픈 사람에게 이전과 똑같은 속도, 똑같은 정도로 일을 수행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픈 사람이 온전히 '아픔'에 집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아픔을 묵인하는 분위기는 '건강한 사회'로 발전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는 '나의 질병'과 '아픈 누군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하는 걸까?
'암환자'로 살아가는 일은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삶이 쓸모없고 고통스럽기만 했을까? 아파하고 죽음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느낀 수많은 감정들은 모두 무의미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밀리와 밀리의 가족들, 제스는 이 모든 과정에서 죽음과 동시에 '삶'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아픔은 사라지지 않고, 죽음을 막을 수도 없으며, 부재하기도 전에 이미 나는 네가 너무도 그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한계를 감내하며 지금 내 눈앞의 너를 사랑하는 일. 삶은 그렇게 의미를 얻고 서로를 온전히 안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밀리의 삶이 그러한 통찰의 힘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