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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하 Feb 23. 2022

후회하는 당신에게

영화 <맘마미아!>(Mamma mia!, 2008)

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열세 번째 편지를 보내요.

올해 첫 편지를 2월 끝자락에 보내려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기별이 늦은 자의 변명으로 들릴지 몰라도요. 무형無形의 당신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순간들이 문득문득 있었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시냐고, 별 일은 없느냐고 말이죠.

지난 두 달간 저는 살아가는 일보단 살아남는 일에 집중해보았습니다. 토익을 치고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뭐 그런 진부한 식이죠. 그 진부함의 끝에 유의미한 결실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었는데 결과도 진부하더라고요. 점수는 하찮았고 인턴은 떨어졌습니다. 많은 일을 지나왔는데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

여기까지 쓰고 나니 초라해서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우는 소리를 해야겠습니다. 스물다섯 명의 구독자님! 대체 사는 건 뭘까요? 하루하루 애는 쓰는데 왜 저의 가치는 올라가지 않는 것만 같을까요?

제가 쓴 글들을 들여다보면 퍽 괜찮은 사람이 보입니다. 그렇게 쓴 대로 살 수 있다면 좋겠건만. 그러기에 사는 일은 왜 이리 쓴지요. 어느 외딴 밤에는 제가 지은 문장들이 저만치 서서 말하는 것 같아요. 야 거기서 뭐하냐? 하고요. 그러면 불안해지죠. 멍청하게 홀로 남아 후회할 미래만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불안사不安死라는 사인으로 발견되기 딱 좋은 그런 날. 살기 위해 찾아보는 영화가 있는데요. 굳이 줄거리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유명한 작품이죠. <맘마미아!>(2008)입니다. 

명작으로 손꼽히지만 사실 스토리는 좀 막장이에요. 결혼을 앞둔 스무 살 ‘소피’가 엄마 ‘도나’의 일기장을 통해 친부를 찾으려다 일어나는 해프닝. 약간만 손보면 한국 일일 드라마에 적합한 소재죠.

처음에는 이 영화에서 로맨스만 보였던 것 같아요. 누가 아빠인지 밝혀내는 일이 가장 중요했고 설레기도 했죠. 조금 자라서 다시 영화를 틀었을 땐 그 안의 여성들이 보였어요. 마을의 모든 여성들이 뛰쳐나와 ‘댄싱 퀸’에 맞춰 춤을 추고 바다에 뛰어들 땐 왠지 모를 해방감이 느껴졌죠. 그런데 불안사 직전의 저에게는 그냥 딱 한 가지가 보여요. 무모하고 바보 같았던 한 시절을 지나온 사람의 미련하고도 후련한 얼굴. 그 얼굴이요.

<맘마미아!>의 도나 (메릴 스트립)

‘그러다 후회한다!’라는 말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감정에 휩쓸려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초라한 어른이 될 거라는 경고로 자주 쓰이는 말이죠. 만약 후회의 여부로 ‘멋진 어른’과 ‘구린 어른’을 구분한다면, 도나는 후자에 가까워요. 십 대 때 집을 나와 혼자 아이를 낳고 20년 간 낡은 호텔을 운영해온 도나는 ‘돈 그놈의 돈!’하고 한탄을 하고 옛사랑 앞에서 스스로를 ‘패자’로 칭하기도 하죠. 지나온 일에 마냥 쿨하고 덤덤하지도 않습니다. 울고 후회하고 흔들리죠. 그리고 그 모든 감정들에 아주 솔직합니다.

덜컥 찾아온 과거 앞에서 도나는 정직하게 말해요. 조금은 후회한다고.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슬프다고. 그다음에는 다시 일어나 눈앞에 놓인 현재를 살아요.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요. 도나는 과거의 과오와 실수, 선택을 변명하거나 억지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그토록 당당히 받아들인 어른을 보기란, 그런 어른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러다 후회한다!’는 메시지를 듣고 자라온 어린이들이라면 특히요. 어쩌면 지난 두 달간 저는 저 경고 내지는 협박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멍청한 짓은 결코 하지 않는, ‘쿨하고 성공한’ 어른이 되기 위해 그토록 어정쩡하고 바보 같은 얼굴로 힘을 주고 있었는지도요. 두려웠거든요. 후회하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일이. 심지어 그 감정을 드러내는 일조차 실패로 생각하고 말았던 겁니다. 그래서 아무 글도 쓰지 못했어요. 들킬까 봐요. 제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이 영화가 저의 불안사를 막을 수 있었던 이유는 흥미진진한 로맨스도 신나는 노래와 춤도 아닌 후회를 기꺼이 짊어진 어른의 개운한 미소였습니다. 놓쳐버린 옛사랑에게 흔들리다가, 걷잡을 수 없이 커버린 딸을 보며 울먹이다가 소피는 끝내 웃죠. 그 미소는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불안해할 필요 없어. 삶은 어차피 네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동시에 너를 따라 흘러가. 넌 실수하게 되고 원망하게 되고 후회하게 될 거야. 하지만 봐, 쉼 없이 어긋나는 템포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잖아. 춤을 출 수 있잖아. 살 수 있잖아.     


beams are gonna blind me        조명 빛에 눈이 부셔도

but I won’t feel blue                    나는 우울하고 싶지 않아

like I alwalys do                           오늘 밤은 달라

cause somewhere in the crowd there’s you     군중 속에 네가 서 있으니까 

                                                       <맘마미아!> OST ‘Super Trouper’ 중     


영화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에 나오는 음악인데요. 소피의 결혼식 전날 밤 파티에서 도나가 지난 연인들과 불렀던 노래를 딸에게 불러주는 부분이에요. 행복한 얼굴로 서툴게 노래하면서 도나가 가리키는 사람은 과거의 사랑이 아닌 소피죠. 후회하고 실패하면서 당당히 지켜낸 도나의 ‘현재’요. 그리고 후회와 실수를 무한히 반복하며 저만의 리듬으로 살아갈 소피의 미래도, 도나의 무대 앞에 있습니다.

이 장면을 자꾸 곱씹는 것은 저 역시 언젠가 나만의 무대에서 웃을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보 같은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겠지만, 그 무대에서 흘러나올 음악을 생각하면 기대도 돼요. 미련하고 멍청한 내 삶이 얼마나 독특한 음조를 띄게 될지 말이죠.

혹시 당신도 후회할 미래를 두려워하느라 잔뜩 힘주고 있진 않나요. 그렇담 우리 힘 좀 풉시다. 뻣뻣하게 춤도 추고 엉성하게 노래도 부르면서요. 마음껏 후회할 작정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리듬으로 그렇게 계속 삽시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당신만의 무대에 오르는 날 그 관중 속에 제가 서 있을게요. 거기서 만나요.


2022.02.23. 사하 보냄.




https://www.youtube.com/watch?v=w0CLtMJ3j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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