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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하 Mar 06. 2022

바라보는 당신에게

영화 <사마에게> X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열네 번째 편지예요.

오늘은 한 가지 질문을 드리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다음 사진을 바라보는 당신의 감정은 어떠한가요?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외곽에 한 군인의 시신이 러시아군 차량 주변에 놓여있고(출처 국민일보), 한 남자가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에서 침공으로 숨진 아들을 잡고 울고 있다(출처 한겨례)

첫 번째 사진에는 표정조차 알 수 없게 엎드린 군인의 시체 위에 하얀 눈이 쌓여있고요. 두 번째 사진에는 죽은 아이의 머리통을 감싸 안은 남자가 울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찍힌 두 사진은 각각 2월 26일과 3월 4일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불과 열흘 사이 일어난 일이죠.

21세기에 찍힌, 찍히고 말아버린 이 두 사진은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촉발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우리의 가슴을 때리는 감정의 이름은 아마 이것일 테죠. 연민, 그리고 분노.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민과 분노는 ‘단발성’입니다. 문득 치솟았다 금세 사그라지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비극에 익숙하고 고통에 친숙하니까요. 저 끔찍한 이미지들도 인류가 시작된 이래 몇 억 번은 더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팟, 하고 치오른 연민과 분노가 그럭저럭 사라지고 나면 또 다른 감정이 검은 잿더미처럼 남아있어요. 제가 결론 내리기로, 이 잿더미의 이름은 냉소와 무력無力입니다.

연민과 분노와 달리 냉소와 무력은 단발성이 아닙니다. 지우려 해도 모르는 사이 까맣게 도로 번져있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는 ‘여기’ 있잖아요. 폭격의 소리마저 삼켜버린 고요한 눈밭도 상실이 훑고 간 응급실의 간이침대도 아닌 ‘여기’요. 화면만 꺼버리면 모든 고통 따위 간편히 치워버릴 수 있는 곳이요. 이 안온하고도 무능한 위치에서 저는 내내 압도당해왔습니다. 고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 차라리 모르고 말겠다는, 비겁한 냉소와 맹렬한 무력감에 말이죠.

영화 <사마에게>의 출연자이자 감독인 와드 알-카팁 감독

시리아 내전을 당사자 시점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 <사마에게>에도 충분히 상상 가능한 영역의 잔혹한 이미지들이 등장합니다. 거리에 늘어선 시체와 무너진 건물 안에서 발견된 어린이, 피범벅과 눈물로 일그러져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수없이 재현되어 판이 박혀버린 ‘전쟁’과 ‘고통’에 대한 이미지들이죠.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저는 냉소와 무력으로 뒤덮인 회색 잿더미에서 한 걸음 벗어난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 영화는 담고 있거든요. 무자비한 무력武力과 무감각한 시체 사진에서는 차마 읽어낼 수 없는 ‘삶’이요. 제가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의, 고통 너머의 무언가요.

영화 <사마에게> 중

영화 <사마에게>에서 병원에 남아 싸우던 시민군은 막 떨어진 거대한 포탄을 보고 농담처럼 ‘난로로 쓰기 딱 좋겠는데’라고 말해요. “최대한 밝게 살려고 한다”던 이웃은 어렵게 구한 감 하나에 뛸 듯이 기뻐하죠. 내전 중에 감독은 청혼을 받아 결혼을 하고, 마을의 한 어린이는 건축가가 되어 망가진 마을을 다시 세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린 형제는 폭격으로 죽은 막내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요. 딸을 잃은 부모는 “너 하나 살리자고 한 건데, 우린 실패했어”라고 소리칩니다.

이들은 모두 살아있어요. ‘고통’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삶’이 그 안에 있죠. 유머도 의지도 행복도 자책도 절망도 모두 구체적인 얼굴과 목소리를 가져요. 그 얼굴과 목소리는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는 몰라. 냉소와 무력에 빠지기엔, 너는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더 알아야만 해.

<타인의 고통>에서 수전 손택은 말해요. 이미지 밖의 ‘우리’는 이미지 안의 고통을 타자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 막대한 잔혹함 속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단절’이라고. 사고의 단절과 관계의 단절. 무력함 속에서 모든 이해의 시도를 멈추고 이미지 너머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고통마저 추상적인 이미지 자체로 동결시켜버리는 것. 그렇게 ‘저기의 그들’과 ‘여기의 우리’ 사이 연결과 책임을 사유하지 않는 것.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


‘resist’라는 영어 단어에는 ‘저항하다’라는 뜻과 ‘견디다’라는 뜻이 함께 있어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의 해외 대피 지원을 거절하고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다. 우리의 독립과 국가를 계속 지킬 것이다’라고 말했죠. <사마에게>에서 시민들도 ‘여기에 남는 것도 일종의 저항’이라고 말하며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뎌요.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감독은 결국 마을을 떠나며 신혼집에서 꽃 몇 가지를 챙겨 나옵니다. 다른 곳에 이것을 가져가 심어 키우겠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이 ‘저기’에서 견디면서 저항하는 동안 ‘우리’도 ‘여기’에서 견디며 저항해야 한다고요. 냉소와 무력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고요. 우리가 모르는 모든 것들을. 모름이 깊어지고 넓어져 ‘저기’에 가닿을 때까지.

    

2022.03.06. 사하 보냄.




아래는 참고한 기사입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6812601&code=61131111&sid1=int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2022/02/26/ADGX66MEPJHOTH2PDCYMH5G3CI/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10335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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