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열다섯 번째 편지를 보내요.
기별이 많이 늦었습니다. 근 두 달간 무탈하셨는지요. 저는 복학 후 이런저런 일들을 통과하느라 계절이 지나가는 풍경도 애써 무시하며 지내왔답니다. 밀린 안부를 한꺼번에 모아 들려드리고 싶지만 딱히 원하시진 않을 것 같으니 넣어두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안부는 늘 저의 관심사이니 언제든 남겨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무엇 무엇의 날’이라고 하면 그 무엇에 대해 잠시 멈춰 생각해보게 되곤 하죠. 제가 열 번째 편지에서 적었듯, ‘잠시 멈춰 생각하는 시간’은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 같습니다. ‘어린이’라는 용어 자체도 그렇잖아요. 100년 전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 사람을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서 어린이를 호명하지 않았다면 이 땅은 아마도 더 척박해졌을 겁니다. 어린이도 존중해야 할 인격(人格)임을 멈춰서 생각해보는 ‘어른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말이죠.
그렇게 잠시 멈춰 생각하는 날을 따로 마련해준 결과 어린이날이면 ‘어린이는 위대하다’는 식의 표어가 돌아다니곤 합니다. 어린이만의 순수하고 독특하며 놀라운 시선이 담긴 일화들을 열거하며 ‘어린이가 미래다’라고 말하기도 하구요. 위대한 어린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에게 새삼스러운 교훈으로 읽혀지곤 합니다.
어린이에게 감복한 순간은 저에게도 존재합니다. 몇 년 전, 으리으리한 아파트로 과외 알바를 간 적이 있는데요. 9살 어린이의 숙제를 도와주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알바를 시작한 바로 그 날 제가 짤렸다는 사실을 일러두어야겠습니다. ‘아이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이유였죠. 정말이지 억울하고도 타당한 해고 사유였어요. 9살의 체력이란 경이로웠고, 저는 2시간 동안 그를 의자에 앉힐 모든 책략을 펼쳤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날 부로 저는 모든 초등학교 선생님을 초능력자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체념한 저에게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대화의 흐름은 이런 식이었죠. ‘선생님 우리집 고양이 사진 보실래요?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고양이는 물이 아니라 소리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고양이가 목욕을 해야 하는데 너무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물소리를 끄고 손으로 물만 쪼끔씩 묻혔거든요? 근데 가만히 있는 거 있죠. 물이 아니라 소리를 무서워하는 걸지도 몰라요. 선생님 근데요, 제가 작년에 생일날 필리핀에 갔는데요. 거기서 열다섯 시간을 공부만 했거든요. 열다섯 시간 동안 앉아있었어요. 저는 달리기는 잘하는데 눈이 좀 못생겼어요. 장점이요? 그런 거 없어요. 근데 있잖아요, 열다섯 시간은 좀 너무하지 않아요?’
숙제는커녕 수다만 듣다 기진맥진해진 채로 거대한 아파트를 빠져나오면서, 저는 말 많고 활달하지만 묘하게 주눅 든 어린이를 가만가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문득문득 저를 놀라게 했지요. 목욕을 싫어하는 고양이를 이해하려는 섬세함과 상상력, 내 장점 같은 것은 모르겠다고 말하는 무구한 얼굴, ‘열다섯 시간은 좀 너무하지 않아요?’라고 묻는 천연한 목소리가요.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어린이는 위대해!’라고 마냥 벅차서 외칠 수 없는 뒤숭숭한 놀라움이었죠.
잠깐 화두를 바꾸어 어린이 시절의 저를 이야기해볼까요. 당시 제 별명은 ‘울보’, ‘징징이’였어요. 눈물이 많았거든요. 지금이야 뭐가 그리 속상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징징 댄다’ ‘또 삐졌다’ 같은 말들은 정말로 싫었습니다. 나는 슬프고 화가 난 건데, 그 마음을 조그맣게 취급하는 것 같았죠. 초등학생 땐 노을이 지는 풍경을 보면서 뱃속 어딘가가 간질간질 쓰라리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모래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가만히 바라보는 기분이랄까요. 지금에야 저는 그것이 쓸쓸함 혹은 공허함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이었다는 것을 압니다만, 어린이였던 제가 그 단어들을 언급했다면 어른들은 ‘쪼그만 게 무슨’이라고 답했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어린이에 대해 잠시 멈춰 생각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요. ‘어린이는 복잡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얼마나 멍청하게 놀라운 깨달음인가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복잡한데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어린이가 자기만의 현재와 감정을 가진 고유한 개체라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위대하다고 말하면서 노 키즈 존(No kids zone)을 만들어 울고 화내는 어린이는 쫓아내고, 어린이는 미래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현재 공부 말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지 않죠. 울고 화내는 어린이는 위대하지 않은 걸까요? 공부보다 고양이가 좋은 어린이는 미래가 아닌 걸까요?
한 명 한 명의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고민, 욕망, 꿈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멈춰서 생각해봐야 하는 거겠지요. 어린이의 시선을 잊어버린, 한때 어린이였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요나 규정이 아닌 ‘함께 꿈꾸는 태도’일지도 모르니까요.
저를 혼돈에 빠지게 했던 어린이를 이제 다시 만나지는 못하지만요.(다시 언급하자면, 짤렸으니까요.) 어린이날이 되면 달리기를 잘하고 고양이를 좋아하고 궁금한 게 많았던 그가 떠오릅니다. 눈물 많고 겁 많고 지금보다 훨씬 다정한 어린이였던 저도 떠오르구요. 누군가의 미래가 아닌 각자의 현재를 살고 있는 어린이들은 지금 꿈꾸고 있을까요? 그리고 한때 어린이였던 당신은 무엇을 꿈꾸고 있나요? 어린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김에, 잠시 멈추어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고유하고도 위대한 어린이들이 꿈꾸는 미래에, 우리가 함께할 수 있도록 말이죠.
2022.05.05. 사하 보냄.
P.S. 조만간 편지 쓰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어떤 꿍꿍이인지 가장 먼저 알려 드릴 테니 기다려주시길. 기다리는 동안 5월의 찬란한 날씨를 만끽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