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빅토리>(Victory, 2024)
안녕하세요, 서른다섯 명의 구독자님. 그리고 우연히 이 글을 찾아오신 분들.
저는 사하입니다.
여름의 끝자락이네요. 선선한 저녁 바람 사이로 가을의 앞자락이 살랑이는 계절인데요. 무더위의 끝물을 무던히 넘어가고 계신지요. 악착스러운 햇발과의 싸움에서 승리해 우리 함께 단풍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질문 하나 드릴게요. ‘싸움’이란 단어에서 어떤 얼굴을 떠올리시나요? 쟁쟁한 태양 아래 잔뜩 찌푸린 눈살이 그려질 수도 있을 테고요. 야무진 주먹 위로 팽팽히 솟은 푸른 핏줄이나 깍 깨문 잇몸, 뻣뻣한 턱근육을 상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적고 보니 왠지 사나운 인상의 사나이가 저를 노려보는 기분이군요.)
오늘은 앞선 묘사와는 조금 다른, 해사한 얼굴의 싸움꾼들을 만나보려 하는데요. 최근 개봉한 영화 <빅토리>와 함께 ‘싸우는 삶’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이야기는 세기의 맨 끄트머리 1999년, 땅끝 거제에서 시작됩니다. 극단의 시공간을 닮은 주인공 ‘필선’은 춤만 출 수 있다면 세상 끝까지 갈 수 있는 아이인데요. 하지만 세기말의 바닷마을 거제는 필선에게 좁디좁습니다. 뭐든 하지 말라는 아버지, 축구부만 편애하는 교장, 빈정대는 선생님들까지 필선을 가로막는 어른들은 많디많지요. 춤을 강탈하는 세상과 ‘맞다이’하기 위해 필선이 강구한 무기는 바로 ‘치어리딩’인데요. 오로지 축구부의 능률을 위하여 허락된 ‘응원부’는 필선에게 댄스부를 위한 다릿돌이 됩니다.
이것이 치어리딩에 관한 이야기라면 갈등의 중심은 치어리딩이겠지요. 물론 필선은 춤도 체조도 아닌 치어리딩을 깔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긋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잠깐이에요. 필선과 아이들은 금세 치어리딩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한 만큼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한 만큼 성장합니다. 아주 좋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처럼, 아이들이 치어리딩을 배우는 과정은 매끈매끈 보들보들하지요.
하지만 이것은 치어리딩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갈등은 치어리딩 너머에서 오지요. 필선과 친구들의 아버지는 거제 조선소의 하청 노동자들인데요. 필선을 곧잘 따르던 후배 ‘소희’의 아버지가 과로로 떨어져 죽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이들은 조선소 ‘윗분’들의 자녀와 시비가 붙어 퇴학 위기에 몰리고요. 필선은 학교를 뛰쳐나와 서울로 향하죠. 그렇게 응원부는 흩어지고, 축구부는 4강에서 패배합니다.
명랑한 청춘 스포츠에 매서운 현실의 논리가 들어선 순간부터, 영화는 싸움에 관한 이야기로 변하는데요. 그 증거로 카메라의 시선은 필선의 아버지 ‘우용’을 향합니다. 사고뭉치 딸내미를 홀로 키우는 아버지, 동료들이 죽어나는 조선소의 관리자 우용은 세상 겁날 것 없는 필선과 너무 달라요. 모욕을 그저 견디는 우용에게 필선은 묻습니다. 아빠는 세상이 그렇게 어렵냐고.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싸우지 않느냐고요.
영화가 필선의 싸움만을 응원했다면, 서울로 향한 필선은 성공한 댄서가 되었겠지요. 실제로 필선은 유명 가수의 댄서가 될 기회 앞에 놓입니다. 하지만 그 문턱 앞에서 필선은 몸을 돌려 거제로 돌아가요. 필선은 춤이 아니라, 춤을 추는 자신의 삶을 사랑했거든요.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던 겁니다. 자신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친구들의 싸움, 그리고 아버지의 싸움을요.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꿈꾸고 사랑하고 노동하는 삶을 응원하기 위해 필선을 끝내지 못한 치어리딩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 응원이 축구부의 동메달 결정전에 어떤 바람을 일으켰을지는 비밀로 남겨두고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얼굴’입니다. 영화 속 싸우는 얼굴들이 얼마나 반짝반짝했는지요. 그 반짝임 바라보는 동안 제게는 몇 얼굴들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필선이 그랬듯 자기 자신으로 살아있기 위해 싸우고 싸웠던 사람들, 유최안, 진현철, 소현숙, 박정혜, 양회동, 방영환…. 이러한 고유한 이름들이요.
그리고 당신도 떠올랐습니다. 꼭 망루 위에 오르고 거리에 몸을 던지지 않아도, 우리를 서로에게서 앗아가려는 이 난폭한 세상에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삶들이 싸움일 테니까요.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 제 마음도 최선을 다해 경기를 마친 선수처럼 두근두근 했겠지요. 필선과 아이들의 응원이, 꼭 멈추지 말고 계속 싸워달라는 말 같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싸웁시다. 온 힘 다해 인상 쓴 사나운 얼굴은 넣어두고요. 아주 춤추듯이 싸워요. 미간에 힘 풀고, 어깨도 툭툭 털고요. 고개 들고, 가슴 펴고. 그렇게 살아있는 우리의 긴 싸움을 이어가 봅시다. 혹 비틀대고 넘어져도 괜찮아요. 스텝이 꼬이면, 그게 춤이니까요.
2024.9.1. 사하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