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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May 24. 2021

내 꿈은 욕쟁이 할머니

하루에 10분씩 무료 영어학습 앱을 보고 있다. 매일매일 다른 영상들을 짧게 편집해 보여주고 문장을 맞추는 게임을 한다. 학습 시간이 짧아 그런지(10분도 가끔은 길게 느껴진다) 실력이 확 늘진 않지만, 유튜브를 잘 보지 않는 나에겐 다양한 영상 콘텐츠들을 볼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그중 며칠 전 본 영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영상 속에는 외국 할머니와 젊은 남자가 나온다. 흰뽀글머리 할머니는 톤 없는 말투로 이런저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Let me help you out of your chair, grandma.

할머니, 의자에서 일어서는 거 도와드릴게요.

How dare you.

이놈이 감히.

I bet I can beat you out of a chair faster than you can blink an eye.

난 네가 눈 깜빡하기도 전에 너보다 먼저 의자에서 일어날 수 있다!


다른 상황에서는 웃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What the hell's the matter with you guys?

너네 대체 왜 그러냐?

Don't you have any sense?

개념이 없냐?

Grow up!

철 좀 들어!


이런 식이다. 짧게 편집된 영상이라 많은 장면을 보지는 못했는데, 할머니의 말투가 딱 내 스타일이었다. 거기다 영어로 하니 듣는 내 입장에서는 뭐랄까,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하니) 귀여움이 흘러넘쳤다(생긴 건 정말 참한 할머니인데).


찾아본 적은 없지만 우리나라에는 각 지방마다 대표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가게들이 있는 것 같다. 욕쟁이 할머니 순댓국, 욕쟁이 할머니 파전, 욕쟁이 할머니 족발 등등등.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그 가게들에 가본 적은 없다. 일부러 욕을 들으러 가게를 찾아가는 심리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 영상을 보는 순간, 왜 사람들이 욕쟁이 할머니에게 욕을 들으러 가는지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욕을 잘 쓰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거리를 걷다 어린애들이 욕을 하는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란다. 초등학생으로밖에 안돼 보이는 아이들이 '씨X, 족XX, 미친X, 엿XX'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슬퍼진다. 도대체 저런 욕은 어디서 배웠을까.

그런 욕들은 하나 같이 독기가 쎄다. 말투도 억양도 목소리도 쎄다. 그래서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몇 대 정도는 때리면서 해야 어울릴 것 같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싸울 때 욕을 한다. 그래야 내가 너보다 '더 쎄다'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앞 차가 차선을 넘어왔다고 뒤쫓아간 운전자는 무작정 욕부터 내지른다. 우리 집 앞에 쓰레기를 버렸다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욕을 내지른다.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부모가 아이에게 욕을 한다. 아르바이트생이 계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가게 주인이 욕을 내뱉는다. 아내가 자신을 무시했다며 남편이 욕을 한다. 다들 자신들이 무어라도 되는냥 욕을 뱉어대는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욕쟁이 할머니는 그런 욕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욕이란 어쩌면 시니컬이나 비판에 가까운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의 내면엔 상당한 냉소가 숨겨져 있다.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웃기는 소리 하네' 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뒤에서 남을 헐뜯거나 간계를 꾸미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냉소가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런 냉소적인 말투를 드러내 놓고 떠들 수는 없다. 그저 꾹꾹 삼켜두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절규하던 이발사처럼 나도 가끔은 갈대밭에게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뭐 꼭 갈대밭은 아니더라도 영상 속 외국 할머니처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다 보니 꿈이 하나 추가됐다. 그건 바로 외국 욕쟁이 할머니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은 흰뽀글머리가 될 때까지 오래 살아야 한다(지금으로선 솔직히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흰머리 할머니가 다소 냉소적인 말을 하더라도 웃어 넘겨줄 수 있도록 확실히 늙어야 한다. 거기다 표정이 귀여우면 더 좋을 것 같긴 한데 이건 자신이 없다. 웃는 얼굴에 침 뱉겠냐는 말처럼 미소를 잃지 않는 정도로 넘어가야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말투는 다소 냉소적이더라도 마음만은 따뜻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없으면 내가 하는 말들 역시 다른 이가 하는 욕과 다를 바 없어진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그동안 참고 참아온 냉소를 폭발하는 것이다. 누가 들어도 뭔가 냉소적인 할머닌데 왠지 미워하긴 어렵군, 하고 느끼게 만드는 게 목표다.


마음에 따뜻함을 담고, 말투는 다소 시니컬하게,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욕쟁이 할머니의 모습이다.




 

<그나저나 저 할머니, 나만 모르는 유튜브 스타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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