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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온전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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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Jun 03. 2021

나만의 집

우리 집은 평범한 아파트다. 지난해 4월 이사를 왔으니 이제 온전히 사계절을 다 지내본 셈이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군더더기 없이 간소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집주인의 장성한 딸 둘의 방환하게 정돈된 거실은 단정해 보였다. 어린아이들 짐으로 늘 어수선한 집에서만 지내던 나에게 이 집은 십 년 후쯤, 딸들이 성인이 된 후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처음엔 2층인 게 마음 걸렸지만, 거실 창으로 나무와 놀이터, 앞으로 아이들이 다니게 될 초등학교가 보이는 풍경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그날 바로 집으로 이사를 오겠다고 마음먹었다.

코로나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고, 외국에 나가려던 계획을 접고, 대신 집을 계약했다.      


이사를 오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게 아이들 방이었다. 아이보리색 동물그림 벽지로 도배를 하고, 싱글 침대 두 개를 나란히 놓았다. 침대 위에는 핑크색 캐노피를 달아 공주방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새로운 집과 방을 좋아하기를 바랐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나는 이사를 많이 다녔다. 초등학교 때는 매 학년 전학을 했었다. 자연히 시절에 친구는 사귈 수 없었다. 딸들에게는 그런 슬픔이 없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아이들은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가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지난 학년에 전학을 온 친구가 있었는데, 모두가 그 친구에게 잘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자신들도 전학을 가면 모두가 잘 대해줄 거라 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새로운 학교에 전학 수속을 하고도 코로나로 몇 달이나 학교에 가지 못했다. 전학생이어서 받을 거라 생각했던 친절이나 주목은 아쉽게도 받을 수 없었다. 

올해 3학년이 되고 3일은 학교에 가면서 다시 학교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마음껏 뛰놀고 친구들도 사귀어야 할 시기에 그러지 못하는 게 마음 아프다. 전학 간 학교에서 잘 지내기만을 바랐는데, 세상에는 아무리 해도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요즘 거실 창으론 6월의 우거진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럴 때면 마치 단독주택에 사는 기분이 든다. 1층과는 달리 큰 나무의 풍성한 잎들이 거실 창에 닿아 있다. 가끔 창을 열고 창가에 서서 흔들리는 나무나 날아오는 새들을 본다. 나무가 있으니 새도 많아 아침에 들리는 새소리는 덤으로 얻는 행운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한다. 아파트지만 땅 가까이 사는 덕에 안정감을 느낀다.


언젠가는 마당 있는 단독주택에 살겠다는 꿈이 있다. 지금은 벌레를 무서워하는 나와 딸들 때문에 단독주택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몇 번인가 단독주택 숙소에서 시험 삼아 지내봤지만 생각보다 불편했었다. 벌레와 안전을 생각하면 내가 좀 더 나이가 들고 난 후에야 가능할 꿈일 것 같다. 일단은 거실 창으로 보이는 푸름에 만족한다.


얼마  내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책상을 안방으로 옮겼다. 가장 큰 방을 잠만 자는 공간으로 쓰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책상을 침대 옆으로 옮겼다. 책상 위에는 아끼는 책 몇 권과 화분이 놓여 있다. 책상 앞에 창이 있어 답답하진 않은데, 웬일인지 내 공간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어와 책상에 앉거나 침대에서 뛰어놀며 말을 걸거나, 남편과 강아지, 고양이까지 신경이 쓰여서 그런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이 집의 전부가 마음에 들다가도 어떨 때는 전부 다 싫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워낙 이사를 자주 다녀 한 집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요즘 내 꿈은 집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탈 정도 거리에 작업실이라 부를 만한 작은 오피스텔을 얻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나와서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나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공간.

결혼 전에는 내내 친정 식구와 살다 결혼 후에는 지금 가족과 사느라 온전히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집이나 공간이 없었던 게 이제야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결혼 전에 잠시라도 독립을 해서 살아봤다면 어땠을까.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간단한 조리 시설만 있는 공간에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봤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나중에 딸들이 커서 어느 정도 나이가 되었을 때, 원한다면 그런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다. 같은 집에 단지 문으로만 나누어진 방 하나가 아닌, 진짜 혼자일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여자이고, 게다가 민감하고 예민한 성격이라서 더, 그런 환경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엄마인 나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경제적인 면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갖기 위한 여성의 경제적 어려움을 글로 썼지만, 나는 그보다 욕심이 더 크다는 게 문제다. 울프만큼의 유산이나 실력도 없이 자기만의 방이 아닌 자기만의 집을 원하다니. 그것도 딸들의 공간까지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에 고민만 커져갈 뿐이다.


나는 이제 좀 늦은 것 같지만, 딸들은 고작 10살이니, 뭐든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그나저나 자기만의 집은커녕 천년만년 엄마랑 같이 산다고 우기면 어쩌나, 나만의 집을 꿈꾸는 나에게, 그게 더 걱정스러운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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