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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May 24. 2019

친구를 선택할 자유는 존재하는가

초등학교 1학년 엄마의 경우


나는 그리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누구를 만나 친해지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일단 친구가 되면 모든 걸 내주는 ‘친구 제일주의’ 인간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혼자 있음이 더 편한 사람’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혼자 밥을 먹는 게 어색하지 않았고, 혼자 영화를 보거나 여행 다니는 걸 좋아했다. 같이 할 친구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 입장에선 같이 가자는 누군가를 떼어놓고 혼자 즐기는 시간이 더 소중했다. 아주 가끔씩은 말이다. 


그러다 매일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어졌을 때, 나는 결혼을 했다. 우리는 각자 회사를 다니거나, 일을 보거나, 아침이면 헤어졌다 돌아와 다시 같은 집에서 살아왔다.

그렇게 자유 아닌 자유를 오래 누린 후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처음엔 알지 못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자유란 불가능하다는 걸 산후조리원 문턱을 넘고 나서야 깨달았다.     


올해 초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나 역시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들이 끝날 시간이 되면 교문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그러다 보면 전에 다니던 유치원에서 알던 엄마가 말을 걸기도 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그때그때 아는 엄마들에 맞춰가며 얘기를 나눴다. 

학교에 조금씩 적응해가던 아이들이 친구와 놀겠다고 해서 친구의 엄마들과 어색한 대화를 시작했다. 카톡을 주고받고 놀이터에서 만나면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나에겐 ‘내 친구’를 선택할 자유가 사라져갔다. 단지 아이 친구의 엄마라는 이유로, 우리는 생판 처음 보는 사이에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눠야 했다. 그게 특정한 한두 명이면 좋으련만, 아이들이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 놀이터에서 어울릴 때마다 그 엄마들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별로 궁금하지 않은 얘기를 나눠야 했다.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요즘 미세먼지가 너무 심하다든지. 

그렇게 놀고 있는 아이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모르는 엄마들과 얘기를 나눈다. 누군가에는 아무렇지 않을 일이지만 솔직히, 내 성격엔 참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다.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어떤 날은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이들의 친구는 아이들의 친구다. 친구의 엄마가 내 친구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같이 노는 친구의 엄마 옆에 서서 입 꾹 다물고 있을 자신도 없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잘 참지 못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 먼저 말을 거는 건 오히려 내쪽이다.

“안녕하세요, 00이는 요새 학교 잘 다니나요? 우리 00이는...”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게 아이를 위한 엄마의 단순 사교활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야 내 아이가 친구들과 잘 지내고, 엄마들이 뒤에서 저 애들 엄마는 애들한테는 통 관심이 없다는 뒷담화를 하지 않겠지. 남들의 뒷말이 두려운 건 아니지만, 우리 아이들이 이상한 엄마 때문에 불쌍하다는 오해를 받을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같은 동에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자매가 있다. 아무 데서나 맨발로 돌아다니고, 개구리를 잡겠다고 조경 분수에 뛰어들고, 남의 자전거나 킥보드를 아무렇지 않게 타고 다니고, 언제나 배가 고파 먹을 걸 달라며 애걸을 하는 등 우리 아파트 엄마들 사이에선 좀 유명한 애들이다. 나도 처음엔 간식도 나눠주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인사도 하고 말도 걸어주었었다. 

자매의 엄마는 뭐라고 해야 할까. 아주 가끔 밖에 나오는데 먼저 인사를 해도 인사를 잘 받지 않아서 이젠 나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 자매는 거의 매일 아파트 단지를 누비고 다니면서 말썽을 일으키는데 엄마는 아이를 거의 돌보지 않는다. 가끔은 너무 배고파하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가 밥을 안 주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어떻게 보면 그 엄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다. 어쩌면 과거에 안 좋은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이 친구 엄마들과 가벼운 아는 체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 역시 그녀의 자유다. 가끔 그녀와 놀이터에 나오면 자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해진다. 그러니 그녀는 자매의 만행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밥 먹고 뒤돌아서면 배고픈 나이라 그저 먹을 것만 보면 누구에게나 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아이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영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는 주변 엄마들의 수군거림이 억울할 수도 있겠다. 자신은 그저,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지 않은 자유를 누리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고들 한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과 엄마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지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매는 폭력적이고, 욕을 하고, 먹을 것을 빼앗는다. 그러니 누가 그런 아이들을 좋아할까. 나 역시 이젠 두 손 들었다. 자매가 우리 애들을 괴롭힌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더 이상 간식을 나눠주지도 않고 얘기도 잘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친구 엄마와 친구가 되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 적당히 조절하는 법도 알게 될 것이다.      


‘친구’라는 단어가 가진 여러 의미 중에 가장 낮은 어느 단계에서 머물거나 아는 이웃 또는 같은 학부모라는 좀 더 넓은 의미의 타인으로만 대하는 법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오히려 섣불리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상처받는 나 자신이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 서툰 기대는 나이를 먹고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에게 친구는 쉽게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랜 시간 또는 힘든 사건들을 함께 헤쳐가고 위로하고 이해하거나 용서하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교문 앞에 서서 엄마들과 겉도는 대화를 나누겠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외쳐 볼 것이다. 친구에게조차 나는, 애정표현이 몹시 서툰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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