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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May 07. 2019

모두의 아이를 위해

     

3월 햇살이 따사로이 품을 파고든다. 햇살 속 고양이는 두려울 것 하나 없다는 듯 연약한 배를 드러낸 채 사람인 양 똑바로 누워 잠들어 있다. 오랜만에 산책을 나선다. 봄이 왔으니 나와서 함께 놀자고 땅속 연약한 풀잎들이 어느새 머리를 토끼 귀처럼 쫑긋 새우고 나를 반긴다. 하늘 한번, 땅 한번, 사람 한번 바라보며 공원을 걷다 보니 이런저런 일들이 떠올랐다.


작은 핏덩이였던 아이가 자라 말을 배우고 조금 더 크니 딸이라 엄마에게 애교도 부리고 했다. 아이가 5살 때였나, 말 안 듣고 보채기만 할 때면 애는 뭐하러 낳아 이 고생을 하나 싶다가도, 엄마 사랑해, 하며 안겨 올 때는 가슴까지 먹먹해졌다. 평소 사랑한다는 말에 서툰 나는 그저 아이를 안고 아무 말 없이 꼭 안아 주고는 했다. 며칠 전인가, 아이가 나를 안으며 “나는 엄마 없으면 못살아”했다. 그런 아이에게 엄마도 너 없으면 못살아, 대답해주다 눈물이 아른거려 한참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없는 삶이란 이미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돼버렸다는 당연하고도 무서운 현실. 아이가 생기는 순간 모든 부모는 가장 큰 약점을 갖게 된다는 말이 실감 났다. 험한 세상에서 그저 탈 없이 무사히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그건 신의 영역이리라. 그저 앞으로 다가올 삶에서 엄마의 사랑을 ‘무기’ 삼아 잘 버티고 이겨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정직하게 흐르는 시간처럼 아이는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가 들어간 초등학교에 마음이 아픈 친구가 있다고 한다. 우리 아이와 같은 반은 아니지만, 엄마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애와 같은 반이 안 돼서 다행이고, 같은 반이 된 누구누구가 힘들어한다는 얘기. 분노 장애가 있다는 아이가 친구들을 때리고 괴롭힌다는 걱정이었는데, 순간 그 애가 우리 아이와 같은 반이 아니라는 데 나 역시 안도가 되었다. 


하지만 공원을 걷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아픈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지, 감히 내 깜냥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는 말을 한다. 내 아이에겐 장애가 있는 아이나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진심으로 그 입장이 돼보지는 못했다. 오히려 누구네 아이가 어떻다더라, 하는 호기심 거리로 전락한 말들에만 귀를 열고 있지 않았나 싶다. 




생각해본다. 모든 아이가 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자기 엄마의 사랑을 ‘무기’로 힘겨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학교에서의 낯선 하루, 입시 경쟁에서의 치열한 경쟁과 사회에 나가 겪게 될 그 수많은 좌절과 눈물과 배신들. 누군가 나에게 다시 젊어지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러고 싶지 않노라 답한다. 다 겪고 해치고 빠져나온 지금이, 차라리 평안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생각이 옳다고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고 싶지도, 당신은 왜 그렇게 사느냐는 같잖은 설교를 해댈 생각도 없다. 다시 한번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나 자신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다. 그런 나이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언제나 막막함이 앞선다. 그런 내가 감히 누군가 다른 이의 아이에 대해 뭐라뭐라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예전 유치원에도 마음이 아픈 아이가 있었다. 그 엄마와 유치원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시간에 나는 감히 아이의 병에 관해 묻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마음이 아픈 아이의 엄마에게 터놓고 얘기를 나누고 같이 공감을 해주는 게 옳은 것인지,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이 옳은 것인지 말이다. 굳이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존중해주는 것이 맞겠지만, 엄마 혼자 짊어지기엔 너무나 무거운 그 짐을 우리 모두가 조금은 나누어져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여전히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엔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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