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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Sep 03. 2022

당신에겐 미래를 함께 그리는 사람이 있나요?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다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은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시의 제목을 '늙어가는 남편에게'로 바꿔 읽어본다.


요즘 남편의 힘든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 위로해 줄까, 그저 옆에서 묵묵히 있어주려 노력한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고치려 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하듯 최선을 다하려 노력한다.


'부부'가 왜 무촌인지

예전엔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우리는 한팀이 되어

아이들을 키우고, 현실을 꾸리고,

막막한 미래를 견뎌낸다.


서로 다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날들이

수없이 많지만,

후회라는 감정 너머

'의리'와 '정', 때론 '안스러움'이

옅은 안개처럼 뒷목을 스친다.







요즘 그리는 미래가 있다.

남편과 나, 둘이 생의 마지막에 함께 떠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부담되지 않게,

누구도 혼자 남아 서러워지지 않게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둘이 손잡고

고생했다 위로하며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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