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열병
도시가 허락한 유일한 색은 질식할 듯한 흰색이었다.
내 생의 기억은 언제나 그 흰색의 뽀얀 안개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색과 소리를 지우고, 오직 가라앉는 침묵과 축축한 무게만을 남기는, 상냥한 질식이었다.
이 도시의 모든 것은 그 안개의 필터를 거쳐 인식된다. 건물의 윤곽은 희미한 그림자로 뭉개지고, 사람들의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매끄러운 가면처럼 떠다닌다. 우리는 모두 이 거대한 가습기 속을 부유하는 미세한 먼지 같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안개의 습기는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우리의 일부가 된다.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안개는 공기였고, 공기는 곧 일상이었으므로.
어머니는 종종 창가에 서서 짙어지는 안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렴, 얼마나 평화롭니. 모든 것이 안전하게 감싸여 있잖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안개처럼 나지막하고 부드러웠다. 그 목소리는 ‘안전’과 ‘평화’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실었다.
그럴 때면 나는 어머니의 곁에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우유처럼 뿌옇게 흘러가는 안개의 강물뿐이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이 도시의 끝은 어디인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었다. 그건 불필요한 것이었고, 불필요한 것은 불안을 낳는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그리고 불안은, 이 도시가 가장 경계하는 불순물이었다.
나의 하루는 언제나 같은 궤적을 그렸다.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고, 정해진 시간에 언제나와 같은 음식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학교로 향한다.
학교로 가는 길에는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솟아나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저 희미한 실루엣과, 교복의 재질이 습기에 젖어 몸에 감기는 눅눅한 감촉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뿐이다. 그것은 기묘한 연대감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모두 같은 안개 속을,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학교는 거대한 흰색 상자였다. 창문은 모두 반투명의 재질로 마감되어 안 그래도 희미한 바깥의 풍경을 더욱 뭉개버렸다. 교실 안은 언제나 적당한 온기와 습도로 유지되었다. 우리는 정해진 자리에 앉아 정해진 과목을 공부한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칠판에 흰 분필이 그어지는 소리와 뒤섞여 단조로운 자장가처럼 울렸다. 내용은 언제나 같았다. ‘안개의 효용성’, ‘안정된 사회의 구성 원리’, ‘정해진 길의 가치’.
우리는 안개가 외부의 혼란과 무질서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신성한 장막이라 배웠다. 우리는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현명한 삶의 방식이라 배워왔다.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질문은 균열의 시작이었고, 균열은 곧 붕괴를 의미했다.
나는 모범생이었다. 질문하지 않았고,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저 안개가 인도하는 대로, 학교가 제시하는 대로 묵묵히 따랐다. 시험에서는 언제나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선생님들은 나를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아이’라고 칭찬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종종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만 하면 된다. 튀지 말고, 모나지 말고, 주어진 길을 따라가렴.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행복이란다.” 아버지의 눈은 안개처럼 흐릿한 회색빛으로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 눈에서 나는 어떤 애정도, 어떤 기대도 읽을 수 없었다. 오직 ‘정상성’에 대한 강박적인 확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안에서 무언가 아주 작은 것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아마, 호흡이었을 것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를 가득 채우는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 그것은 분명 나를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었지만, 동시에 목을 조르는 비단끈처럼 느껴졌다. 상냥하지만, 집요하게.
어느 날 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렸다. 창문을 열자 왈칵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신선한 공기가 아닌, 평소보다 더욱 짙고 무거운 안개의 입자들이었다. 빨리 창문을 닫고 언제나처럼 다시 침대에 누워 자라는 듯이 목을 졸라왔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쌕쌕거렸다. 죽을 것 같다는 공포. 그러나 그 공포의 실체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거대한 흰색 솜뭉치에 파묻혀 서서히 질식해가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세계는 미세하게 균열하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숨이 막히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교실에서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다가도, 식당에서 음식을 넘기다가도,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다가도, 나는 돌연 거대한 뱀이 온몸을 조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내면에서 차오르는 정체 모를 불안과 우울은 안개의 습기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점점 말수가 줄었고,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변화는 나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가장 뒷자리에 앉는 아이가 있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저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존재하던 아이. 어느 날 ‘안개의 효용성’ 시간에, 그 아이가 손을 들었다. 교실의 모두가, 심지어 선생님조차도 놀라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안개 속에서 처음으로 명확한 형태를 가진 존재를 목격한 듯한 충격이었다.
“선생님.”
아이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안개 밖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까?”
순간, 교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안개 밖’. 그것은 금기어였다. 우리가 상상해서도, 입에 담아서도 안 되는 단어. 선생님의 온화하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필요한 질문이구나. 안개 밖은 혼돈과 위험뿐이다. 우리는 이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바람이 불고 안개가 걷히는 순간, 아주 멀리 끝없이 이어진 땅과 다른 색의 하늘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고요. 파란색… 같은.”
‘파란색’. 그 단어가 내 귓가에 박혔다. 세상에 흰색 말고 다른 색의 하늘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아이의 말은 교실 안에 미세한 파문을 일으켰다. 아이들은 불안한 듯 서로의 눈치를 보았고, 몇몇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분필을 부러뜨릴 듯 세게 쥐며 말했다.
“헛소문일 뿐이다. 그런 헛소문에 현혹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안개를 벗어나려 했던 자들은 모두 길을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역사이고, 진실이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필사적인 구석이 있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그 말을 확인시키려는 듯이. 그날 이후 한동안 그아이는 언제나처럼 다시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가끔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언제나와 같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며칠 후, 뒷자리의 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누구도 그 아이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잠깐 수군거렸으나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이의 자리는 깨끗하게 지워졌다.
하지만 아이가 남긴 질문은 내 안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안개 밖’. ‘끝없이 이어진 땅’. ‘파란색 하늘’. 그 단어들은 내 머릿속을 맴돌며 잠자고 있던 무언가를 깨우고 있었다.
나는 도서관에 갔다. 도시의 역사가 기록된 책들은 모두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위대한 안개의 축복’, ‘혼돈으로부터의 구원’. 하지만 구석진 서가에서,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누군가의 수기처럼 보이는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훼손되어 있었지만, 군데군데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문장들이 남아있었다.
[…안개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처음에는 우리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했다. 우리는 색을 잃었고, 소리를 잃었다. 오직 생존만이 남았다. 아니, 생존이라기보다는 사육에 가깝다…]
[…몇몇은 경계를 넘으려 시도했다. 그들은 ‘바람’이 부는 곳이 있다고 믿었다. 안개를 걷어내는 거대한 숨결. 그곳에 가면 잃어버린 색들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돌아온 자는 없었다. 그들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가끔 아주 맑은 날, 안개가 옅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찰나의 순간, 도시의 가장 높은 첨탑에 오르면 볼 수 있다고 한다. 경계 너머의 세상을. 푸른 하늘과, 붉은 노을과, 초록의 대지를. 그러나 그것을 본 자는 안개의 안락함에 더는 만족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영원히 불행한 자가 되어 경계를 떠돌게 되리라…]
책을 읽는 내내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것이 뒷자리의 아이가 말했던 소문의 근원일까. ‘파란색’이라는 단어가 다시 한번 내 의식을 강타했다.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답답함과는 다른 종류의 질식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한, 고통스러운 각성의 전조였다.
그날 밤, 나는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안개 밖은 정말 위험한 곳인가요?”
아버지는 신문을 읽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지?”
“그냥… 궁금해서요. 다른 세상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아버지는 신문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는 실망과 피로가 섞여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이 안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전부다. 안개 밖은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불확실하고, 위험하며, 무엇보다… 비효율적이지. 정해진 길을 버리고 미지의 것을 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너는 이미 가장 좋은 길 위에 서 있다. 그 길을 의심하지 마라.”
어머니도 아버지의 말을 거들었다.
“얘야, 밖은 춥고 무서운 곳이란다. 이 포근한 안개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거야. 왜 사서 고생을 하려 하니. 모두가 가는 길로 가는 게 가장 안전하단다.”
부모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상냥했지만, 그 상냥함 뒤에는 얼음장 같은 단호함이 숨어있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걱정이었지만,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의 벽을 확인시켜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들의 세계에서 ‘안전’과 ‘행복’은 ‘통제’와 동의어였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의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왜 그들은 안개 밖의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정말 우리를 위해서일까, 아니면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일까. 혹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이 ‘안정’이라는 것이 실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예전의 그 무기력한 고독과는 달랐다. 내 안에는 이제 ‘안개 밖’이라는, 작지만 꺼지지 않는 불씨가 남았다. 나는 매일 밤 창밖을 내다보았다. 질식할 듯한 흰색의 장막 너머를. 언젠가 안개가 옅어지는 찰나의 순간, 저 너머에서 푸른빛이 새어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품고서.
나의 우울은 이제 단순한 답답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확한 대상을 갖기 시작했다. 나를 짓누르는 이 상냥한 흰색의 세계. 나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고, 하나의 길만을 강요하는 이 거대한 침묵. 나는 이 모든 것에 저항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안개 속에 갇힌 무력한 개인일 뿐이었다.
수업 시간, 나는 더 이상 선생님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교과서의 활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귓가에는 알 수 없는 바람 소리가 웅웅거리는 듯했다. 어쩌면 뒷자리의 아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 경계를 넘어, 이름 모를 ‘파란색’을 찾아 떠난 것일지도. 그 생각은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기묘한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앓기 시작했다. 몸에 열이 오르고, 온종일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저 도시의 습한 기후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애매한 진단을 내릴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몸의 병이 아니었다. 색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유일한 색을 갈망하기 시작한 영혼의 병이었다. 뽀얀 안개 속에서 나 홀로, 선명한 파란색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병 속에서, 나는 언젠가 이 질식할 듯한 흰색의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그것이 설령 비참한 최후로 끝나는 길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