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불씨(2)

파란 하늘

by 루트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혀가 마비되고, 호흡이 멎었다.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어야 하나. 아니, 그보다 먼저, 너는 누구냐고, 내가 아는 그 아이가 맞느냐고 물어야 했다. 하지만 어떤 단어도 문장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나는 그저 뻐끔거리는 물고기처럼, 희미한 안갯빛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른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그 아이였다. 아이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그것은 단순한 미소가 아니었다. 안개 속에서 처음으로 본, 명확한 형태를 가진 감정의 표현이었다. 그 웃음 하나로 주변의 무겁고 축축한 공기가 잠시 투명해지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오랜만이야."

목소리는 예전처럼 마른 나뭇가지 같지 않았다. 적당한 습기를 머금어 단단하고, 어떤 소음에도 흩어지지 않을 듯한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내 귀에 닿는 순간, 비로소 나는 멈췄던 숨을 가늘게 내쉴 수 있었다.

그 아이의 모습을 제대로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안개의 흐릿함을 거치지 않은 존재를 보는 것은 이런 느낌이었나. 그 아이는 모든 것이 선명했다.

안개 속에서도 유독 선명했던 어깨선은 희뿌연 세계를 정확히 그어놓은 가는 선처럼, 흐릿한 주변과 명확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얼굴선은 흐릿한 윤곽이 아니라 날카로운 조각처럼 느껴졌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안개와 같은 회색이 아닌, 짙은 먹물처럼 깊고 투명했다. 그 눈은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기도, 혹은 나를 통해 나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이들처럼 흰색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이의 몸짓 하나하나가 옷의 색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흰색에 갇힌 것이 아니라, 잠시 흰색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존재 자체가 하나의 뚜렷한 색채였다.

"…나를, 알아?"

간신히 쥐어짠 내 목소리는 갈라지고 볼품없었다.
그 아이는 다시 한번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반이었잖아. 나는 뒷자리에 앉아 있어서 넌 날 잘 몰랐겠지만. 난 널 기억해. 언제나 가장 앞자리에서, 가장 반듯한 글씨를 쓰던 애."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기억되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가장 필사적으로 연기했던, 가장 완벽한 흰색의 모습으로. 부끄러움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아이는 창틀에 기댄 몸을 바로 세우고 나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그리고는 이 먼지 쌓인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맑고 선명한 목소리로, 호기심이 선명히 비치는 맑은 눈동자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인데."

그 질문은 마치 쐐기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나는 이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져왔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무엇을 찾으러 이곳에 오는가. 하지만 단 한 번도 명확한 답을 내린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말처럼 ‘쓸데없는 짓’이었고, 선생님의 말처럼 ‘헛소문에 현혹된’ 어리석음이었으며, 나 스스로가 내린 결론처럼 ‘절망에 익숙해지기 위한’ 행위였다.

하지만 그 아이의 맑은 눈동자 앞에서, 그 어떤 변명도, 자기기만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침묵은 먼지처럼 내려앉아 첨탑 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책에서 본 파란 하늘을 찾으러 왔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제풀에 지쳐 그만뒀다는, 그 길고 부끄러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어떤 변명도, 어떤 진실도 이 맑은 눈동자 앞에서는 초라한 자기기만이고 자기변명에 불과할 터였다. 내 입술은 굳게 닫혔고,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차가운 바닥만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때,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혹시… 오래된 책을 봤어?"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는 창밖의 희뿌연 안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도시의 역사 같은 게 아니라, 누군가 손으로 쓴 것 같은 낡은 책. 가장 높은 첨탑에 오르면 경계 너머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적힌."

나는 잠시 숨을 삼켰다.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봤어."

나의 대답에 아이는 시선을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어떤 놀라움이나 비난도 없었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이해심만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에 용기를 얻었는지, 혹은 더는 숨길 수 없다는 체념 때문이었는지, 내 안에서 억눌려 있던 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책을 보고… 매일 이곳에 왔었어. 아주 오랫동안. 언젠가 안개가 걷히는 날, 책에 적힌 것처럼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엔 지쳐버렸어. 이건 미친 짓이라고, 헛된 망상일 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고, 잊으려고 애썼어. 모두가 사는 것처럼, 이 안개 속에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려고. 그런데 얼마 전에, 널 봤어. 고등학교 때, 파란 하늘에 대해 질문했던 너를. 네가 이 도시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안 순간, 죽은 줄 알았던 무언가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된 거야."

말을 마친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수년간 묵혀두었던 고백이었다. 아이는 내 말을 끊지 않고 조용히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침묵과 수긍이 어떤 위로의 말보다 더 깊게 나에게 와 닿았다. 아이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윽고 나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린 아이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너는 왜 파란 하늘을 찾았던거야?"

왜 파란 하늘을 찾았던 것이냐는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왜?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것은 그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찾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되찾으려는 본능으로 움직였을 뿐, 그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내 안에서 요동치는 감각들을 더듬었다. 처음 ‘파란색’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의 충격. 낡은 책을 읽으며 터질 듯 뛰던 심장. 너를 다시 보았을 때 잿더미 속에서 되살아나던 불씨. 그 모든 순간의 감각들을.

"…모르겠어. 정확히는 몰랐어. 그저…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이곳이 세상의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아는 이 무채색의 풍경 말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지. 모든 것이 정해진 길 위에서,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는 이곳과 달리, 그곳은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살아있다고 느껴졌어. 너를 다시 봤을 때도 그랬어. 내 안에서 죽었다고 믿었던 무언가가 다시 꿈틀거렸지. 심장이 뛰고, 피가 도는 감각. 잿더미 같던 몸에 다시 온기가 도는 느낌. 나는 그 감각을 되찾고 싶어서, 그게 진짜 살아있는 거라고 믿어서 파란 하늘을 찾았던 것 같아."

내 대답을 들은 아이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투명한 눈동자는 내 말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담아낼 뿐이었다.

그 아이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질문은 이전보다 더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파란 하늘의 무엇이 너를 그렇게 뛰게 했는데?"

나는 말문이 막혔다. 다시금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파란 하늘의 무엇이? 나는 그저 ‘파란 하늘’이라는 관념 자체에만 매달려왔다.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것은 파란 하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줄 것이라 믿었던 ‘살아있다는 감각’이었을 뿐이다.

그 아이의 질문은 나에게 본질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기억을 더듬었다.

선명한 파란색을 떠올릴 때마다 나를 덮쳤던 열병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그 고열은 내 안의 무엇을 태우고 있었기에 그토록 고통스럽고도 황홀했던가.

이 도시가 허락한 유일한 색은 질식할 듯한 흰색이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던 색. 안전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색. 정해진 길을 걸으면 보장되는 색. 나는 단 한 번도 그 흰색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공기였고, 세계 그 자체였으므로.

파란색은 그 완벽한 흰색의 세계에 떨어진 이질적인 잉크 방울이었다. 그것은 흰색을 침범하고, 더럽히고, 본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존재였다.

나의 열병은, 내 안의 흰색이 그 파란 잉크에 물들며 저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마찰열이었다. 파란색이 태워버린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이루고 있던 그 견고한 흰색의 세계였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안개 그 자체가 아니라, 안개가 상징하는 ‘흰색’의 가치들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던 ‘평화로움’. 아버지가 강요했던 ‘안전함’. 선생님이 가르쳤던 ‘효율성’. 그 모든 상냥하고 합리적인 단어들이 나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파란 하늘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색의 풍경을 보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세계를 지탱하던 모든 흰색의 가치들을 부정하고, 그것들 없이도 온전히 설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행위였다.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불확실성 속으로 걸어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파란 하늘을 보는 행위 자체에만 매달렸다. 그것만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진짜 대답을 꺼내놓았다.

"…안전함. 그리고 평온함. 파란 하늘은 내가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던 그 모든 흰색의 가치들을 태워버렸어. 정해진 길, 예측 가능한 미래, 모두가 옳다고 믿는 정답들. 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서… 파란 하늘을 찾았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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