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의 뒷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나 혼자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그 자리에 서서 오직 텅 빈 공간만을 응시했다. 멈춰버렸던 심장이 쿵, 하고 거칠게 바닥을 치며 다시 뛰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이전의 무기력한 박동이 아니었다. 얼어붙었던 피가 녹아내리는 소리, 잿더미 아래에서 잠자던 불씨가 숨을 토해내는 소리였다.
풀무질로 되살아난 불꽃은 순식간에 온몸의 혈관을 길 삼아 달려 나갔다. 차갑게 식어 있던 손끝과 발끝까지 뜨거운 기운이 퍼져나가며 희미한 전율이 일었다. 그 단 몇 초의 스침은 나의 잿빛 세계에 떨어진 하나의 푸른 불꽃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화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공허를 남김없이 태우고도 남을 만큼 선명하고 뜨거웠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다음 날부터 나의 동선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그 아이를 보았던 건물 모퉁이. 나는 가장 먼 강의실을 갈 때조차 일부러 그곳을 지나쳤다. 첫날, 나는 그 모퉁이를 향해 걸으며 마주 오는 모든 이들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안개 속에서도 유독 선명했던 그 얼굴의 윤곽, 정해진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듯한 걸음걸이를 찾기 위해 시선을 분주히 움직였다.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고 신발 끈을 고쳐 매는 척하며 잠시 머물렀다. 수많은 흰색 옷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어디에도 익숙한 실루엣은 없었다.
이튿날, 나는 더 일찍 집을 나섰다. 단순히 그곳을 지나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아예 그 건물 앞 광장이 잘 보이는 계단참에 자리를 잡았다. 강의 시작 전, 수백 명의 학생들이 흰색의 강물처럼 광장을 가로질러 각자의 건물로 흩어졌다. 나는 그 거대한 흐름을 전부 눈에 담았다. 한 명 한 명의 어깨선을, 걸음의 속도를, 희미하게 보이는 머리카락의 형태를 좇았지만, 강물은 그저 균일한 흰색으로 흘러갈 뿐, 내가 찾던 특별한 물결은 나타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식당 구석에 앉아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은 채, 입구를 드나드는 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흰색 식판, 흰색 테이블, 흰색 벽, 그리고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 세상의 모든 것이 뿌옇게 번져 보이기 시작했다.
사흘째가 되자, 나의 행동반경은 캠퍼스 전체로 확장되었다. 나는 더 이상 강의실로 향하는 길 위에서만 그 아이를 찾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 대신 다른 단과대학 건물들을 배회했다. 낯선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비어있는 강의실을 기웃거렸다. 누군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것은 언제나 똑같은 풍경뿐이었다. 안개에 젖어 축축한 복도, 반투명 유리창 너머로 희미하게 움직이는 흰색 형체들. 모든 것이 흐릿하고 불분명했다. 희망은 점차 초조함으로, 이내 무거운 실망감으로 변해갔다.
며칠이 더 흐르자, 나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가 되었다. 나의 시선은 초점을 잃고 안개처럼 부옇게 흩어졌다. 나의 고개는 다시금 바닥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저 흰색의 흐름 속에서, 나 역시 한 점의 흰색이 되어 정처 없이 떠다녔다. 어쩌면 그날 내가 본 것은, 파랑을 앓던 소년이 남긴, 사라지지 않은 잔상이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 안에서 되살아났던 작은 불씨 위로, 차갑고 축축한 절망의 재가 다시금 흩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잿더미 속에서도, 한번 되살아난 불씨는 쉬이 꺼지지 않았다. 나는 강의가 끝나면 으레 향하던 도서관 대신, 정처 없이 캠퍼스를 걷기 시작했다. 다른 과의 강의실 복도를 기웃거리고, 학생들이 모이는 광장을 맴돌았다. 하지만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풍경뿐이었다. 표정 없는 흰색의 가면들, 안개 속을 부유하는 희미한 실루엣들. 그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도시는 다시, 질식할 듯한 흰색으로 나를 밀어내는 듯했다.
며칠간의 방황은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주말이 되자, 나는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도시의 거리를 걸었다. 이곳저곳을 헤맸다. 무엇을 찾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명확한 목적도 없었다. 그저 걷고 또 걸었다. 발바닥이 아파올수록, 내 안의 불씨는 점점 사그라드는 듯했다. 결국 내가 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다시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지친 발걸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시의 한 편.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던, 나의 희망과 절망이 퇴적된 곳. 나는 홀린 듯이 첨탑의 입구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것이 언제였더라. 기억조차 아득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먼지는 예전보다 더욱 두껍게 쌓여, 내 발자국을 깊게 삼켰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과거의 나를, 이곳에 묻어두었던 나의 절망을 다시 파헤치는 행위 같았다.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저 앞에 보이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보이는 것은 똑같은 흰색의 바다일 터였다. 확인하고, 단념하고, 다시 잿더미로 돌아가기 위해. 그것이 이 순례의 마지막일 터였다. 그렇게 마지막을 다짐하며 복도를 지나온 바로 그 때, 창가에 누군가 먼저 와 있었다.
창틀에 팔을 기댄 채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뒷모습, 나와 같은 이들이 입는 평범한 흰색 옷. 하지만 안개 자욱한 빛을 받는 그의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나는 숨을 죽였다. 심장이 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이 좁고 먼지 쌓인 공간에, 나와 그 아이, 단둘만이 존재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이는 순간, 그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몇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또렷한 얼굴의 윤곽. 오래전 교실 가장 뒷자리에서, 모두가 침묵할 때 홀로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졌던, 바로 그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