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도시(3)

파란 불씨

by 루트

대학 생활은 이 도시가 규정하는 ‘성공’의 연장선이었다. 나는 그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완벽한 연기자였다. 거대한 흰색 상자와 같은 강의실, 언제나 그림자 하나 없이 평평한 빛을 쏟아내는 조명 아래 가장 앞자리는 나의 지정석이었다.

교수님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무향의 공기 속을 떠다니면, 나는 마치 다른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손으로 그의 모든 말을 받아 적었다. 지식을 탐구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소리를 활자로 변환하는, 영혼 없는 필사에 가까웠다.

​날이 어두워지면 도서관의 가장 깊숙한 곳, 흰색 책등만이 끝없이 이어진 서가 사이에 나를 가두었다. 형광등의 낮은 소음과 메마른 종이 냄새 속에서, 나는 스터디 그룹을 위한 요약 자료를 만들고 발표 과제를 준비했다. 동기들은 나의 노트를 빌려가며 감탄했고, 나의 명료한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해.”, “너처럼 되고 싶어.”

그런 찬사는 나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차가운 안개가 한 겹씩 더 나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었다. 친절하고 유능한 동료. 그 가면은 점점 더 두꺼워져 내 본래의 얼굴을 잠식해 들어왔다.

​나의 노트는 완벽한 흰색 종이 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검은 활자들로 채워진 질서의 결정체였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지식을 보았지만, 나는 오직 텅 빈 공간을 보았다. 질문도, 의심도, 다른 색의 생각도 끼어들 틈이 없는 아름답고 견고한 감옥.

교수님들은 나의 리포트를 모범 답안으로 칭찬했다. 겉으로 보기에 내 삶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하게 통제된 흰색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매일 밤, 기숙사의 침대에 누우면 나는 의식처럼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네모반듯한 흰색 상자 같은 방. 눈을 뜨면 사방의 벽과 천장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집요하게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나는 점성이 높은 흰색 페인트 통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천장의 형광등은 그림자 한 점 허락하지 않는 차가운 빛을 쏟아냈고, 그 빛 아래에서는 모든 감정과 기억이 색을 잃고 표백되는 듯했다. 숨을 쉴 수는 있었지만, 건물 환풍구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소음과 뒤섞인 공기에서는 언제나 희미한 화학 약품 냄새가 났다.

​창밖에서는 도시의 안개가 유리창에 축축한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다. 마치 방 안의 마지막 남은 공기마저 빨아들이려는 듯, 희뿌연 어둠이 유리에 달라붙어 나를 감시했다. 그럴 때면 하루 동안 만났던 사람들의 미소, 나누었던 대화, 성취했던 과제들이 모두 의미 없는 흰색 부유물이 되어, 형광등 불빛 아래 먼지처럼 떠다녔다.

나는 그 속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휘저었다. ‘괜찮아, 이것이 안정된 삶이야.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 주문처럼 되뇌는 말들은 그러나 방 안의 밀도 높은 침묵에 부딪혀 아무런 울림도 만들지 못했다. 그것은 나를 물 위로 잠시 띄워주는 작은 공기 방울에 불과했고, 밤이 깊어지고 환풍구 소리마저 잠들면, 그 방울들은 이내 터져버렸다. 나는 다시 질식할 듯한 압박감 속으로, 이 흰색 관의 한가운데로 가라앉았다.

내 안의 파란 하늘은 이제 흔적조차 없다고 믿었다. 첨탑의 기억은 먼지 쌓인 책처럼 뇌의 가장 깊은 서고에 처박아 두었다. 열병을 앓았던 소년은 죽었고, 남은 것은 안정적인 미래라는 대리석 비석을 짊어진, 순응하는 어른뿐이라고. 내 마음은 차갑게 식은 잿더미였다. 한 줌의 온기도 없이, 회색 잿더미만이 스산하게 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잿더미를 들여다보는 것조차 그만두었다. 그저 그 위에 ‘성실’과 ‘성과’라는 흰색의 천을 덮어두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 표백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여느 때처럼 강의실로 향하는 무채색의 인파 속에 내 몸을 맡긴 채 기계적으로 걷고 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캠퍼스의 흰 보도블록 위를 무심하게 떠다녔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강의실로 향하는, 수많은 흰색 옷의 흐름 속에서 나는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입자였다.

안개는 언제나처럼 축축하게 내려앉아 건물의 윤곽을 뭉개고 소리를 삼켰다. 귓가에는 오직 수많은 발들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와 낮은 웅성거림만이 눅눅한 공기 속을 부유할 뿐이었다.

나는 보통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신발 끝과, 희미하게 보이는 앞사람의 발뒤꿈치, 그리고 균일한 간격의 보도블록. 그것이 내 시야의 전부였다. 다른 얼굴들을, 다른 표정들을 마주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바로 그때, 무언가 아주 사소한 불협화음이 나를 스쳤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공기의 미세한 흐름이었을까, 아니면 인파의 균일한 소음 속에서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어떤 이질적인 발소리였을까. 나도 모르게, 아주 오랜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숨을 멈췄다.

저만치 앞서가는 무리 속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뒷모습이 있었다. 다른 이들과 같은 흰색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 옷에 갇혀있지 않은 듯한 걸음걸이. 안개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어깨선. 심장이 이유 없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인파를 헤치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사람이 잠시 고개를 돌려 옆을 보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분명한 그 얼굴의 윤곽. 오래전, 교실 가장 뒷자리에서, 모두가 침묵하던 그곳에서 홀로 손을 들었던 아이.
‘파란색’을 입에 담았던, 그리고 연기처럼 사라졌던 바로 그 아이였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친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는 나를 인식하지 못한 채 다시 앞으로 걸어갔고, 이내 다른 건물 모퉁이로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그가 사라진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 몇 초의 스침.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아이의 등장은 마치 거대한 풀무질과 같았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거센 바람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 마음속 화로를 향해 불어닥쳤다. 겹겹이 쌓여있던 흰색의 천들을 걷어내고는 이윽고 회색 잿더미들이 폭풍처럼 휘날려 올랐다.

공허하다고 믿었던 심장께가 아플 정도로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마침내 잿더미들이 걷혀나간 가장 깊은 바닥에서, 나는 보고 말았다. 결코 꺼지지 않았던, 그러나 너무나도 작아 스스로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작은 불씨 하나가 붉은 빛을 희미하게 깜빡이는 것을.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오래전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단호하게 외치던 선생님의 목소리. 불안에 떨던 아이들의 수군거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꿰뚫던, 가늘지만 단단했던 질문.

[…바람이 불고 안개가 걷히는 순간…]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아이는 그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이 도시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바람이었다.

모든 것을 잠재우는 안개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 잿더미를 날려 버리고, 숨죽인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하는, 살아있는 숨결. 나는 그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아주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