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답을 들은 아이는 길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에는 어떤 평가도, 동정도 없었다. 그저 나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깊은 수긍만이 담겨 있었다.
"그렇구나."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어떤 말보다 무겁게 내 마음에 내려앉았다. 나의 길고 어두웠던 열병과, 비겁했던 항복, 그리고 잿더미 속에서 겨우 찾아낸 희미한 깨달음까지, 그 모든 것을 아이는 온전히 이해해주는 듯 했다.
그 이해심 앞에서 나는 오히려 초조해졌다. 방금 전의 고백이 너무 거창하고 치기 어린 선언처럼 느껴졌다. 나는 변명처럼, 혹은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지는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게 해방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해도… 그래서 저 안개 너머의 파란 하늘을 본다고 해도 말이야. 그걸 본다고 해서 이 질식할 것 같은 도시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결국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할 거라면, 잠시 다른 색을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더 큰 혼란과 불행을 짊어지게 될 뿐인지도 몰라."
나의 의구심 섞인 독백을 잠자코 듣고 있던 아이가, 너무나도 간단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직접 보면 되겠네."
나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부드러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같이 보러 갈래?"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 내가 했던 모든 고민과 회의가 무색해지는, 너무나도 가볍고 명쾌한 제안이었다.
"…본다고? 진짜로 볼 수 있다는 말이야? 어떻게? 나는 몇 년을 이곳에 왔지만, 본 것은 안개뿐이었어. 책에서도 아주 가끔, 찰나의 순간에만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나의 당황한 반문에 아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는 건 어렵지 않아.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아이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몸을 돌려 첨탑의 어두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와."
나는 홀린 듯이 아이의 뒤를 따랐다. 아이는 우리가 올라왔던 계단 쪽이 아닌, 창문의 반대편,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후미진 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채 굳게 닫혀 있는 낡은 철문이 있었다. 문에는 붉은색 페인트로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아이는 그 문고리를 잡기 직전, 나를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말했다.
"지금 가면, 돌아오는 데 꼬박 하루는 걸릴 거야."
‘하루’. 그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경고등처럼 울렸다. 기숙사 통금 시간. 내일 오전에 있을 중요한 강의. 완벽하게 짜여 있던 나의 일과. ‘안정적인 미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단 한 번도 어겨본 적 없던 규칙들. 그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해방되고 싶다고, 이 모든 흰색의 가치들을 태워버리고 싶다고 외쳤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규칙의 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 사슬은 도시가 채운 것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가 붙들고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문 앞에서 망설이는 나 자신이, 바로 나의 가장 견고한 감옥이었다.
나는 아이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차가운 철제 문고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이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한 곳, 잿더미 아래에서 희미하게 타오르던 불씨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갇혀 있던 시간이 훅 하고 쏟아져 나왔다. 그곳은 도시의 시간 흐름에서 잊힌 듯한 케이블카 탑승장이었다. 공기 중에는 낡은 기계 기름과 축축한 곰팡이가 뒤섞인 냄새가 났지만, 그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바깥 공기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바닥은 뽀얀 먼지가 솜털처럼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으나, 문에서부터 탑승장 중앙의 케이블카까지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법한 희미한 길이 나 있었다. 누군가의 발자국 위에 또 다른 발자국이 겹쳐지며 다져진, 비밀스러운 통로였다.
탑승장 중앙에는, 낡고 빛바랜 붉은색의 케이블카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케이블카가 매달려 있는 긴 케이블은 안개밖으로 사라져있었다. 유리창은 두꺼운 먼지층에 덮여 있었지만, 케이블카에 앉았을 때 정면으로 보일 법한 부분만큼은 누군가 팔을 뻗어 닦아낸 듯, 반원 모양으로 케이블카의 내부가 비쳐 보였다. 케이블카는 마치 거대한 곤충의 허물처럼 보였지만, 문손잡이 부분만큼은 반복된 접촉으로 먼지 아래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도시의 상공에 매달려 있어야 할 것이, 마치 비밀을 품은 채 웅크리고 있는 동물처럼 고요히 실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걸 타면 돼. 저 안개 너머, 이 첨탑 바로 뒤에 가려진 산이 있어. 그 정상까지 가면 돼."
그 아이는 케이블카를 지나쳐 먼지 쌓인 난간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난간에 살짝 기대며 덧붙였다.
"거긴 안개가 닿지 않아. 늘 하늘을 볼 수 있어."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케이블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왜 아무도 이걸 이용하지 않는 거야?"
"전력이 불안정하거든.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는 케이블카가 움직일 때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 산 정상에서 멈췄다가, 다음 날 같은 시간이 되어야 다시 작동해. 그래서 아무도 타려고 하지 않지. 비효율적이잖아."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작동 시간이 아니라서, 아까 창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이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음, 아직 몇 분 남았네."
아이는 케이블카 옆 난간에 기대앉으며, 나를 보지 않은 채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처음엔 그 책만 믿었어. 매일같이 창가에 서서 안개가 걷히기만을 기다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지."
아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 맑은 눈동자가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변하는 건 없었어. 이 첨탑 꼭대기에서 마주하는 건 언제나 똑같은 흰색의 바다뿐이었지. 너도 그랬던 것처럼."
"… 어떻게 여길 찾은 거야?"
나의 질문에 아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거든. 책에는 '가장 높은 첨탑에 오르면 볼 수 있다'고만 쓰여 있었지, '창밖을 내다보면'이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어쩌면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 아이는 난간에서 내려와 탑승장 가쪽을 천천히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이 첨탑을 전부 뒤지기 시작했어. 그러다 이 문을 발견했지. '출입 금지'. 이 도시에서 금지하는 건, 보통 나에게는 정답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굳게 닫힌 낡은 철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출입금지라면 문은 굳게 닫혀 잠겨 있었을 텐데."
"응. 처음엔 나도 그냥 잠겨있는 문인 줄 알았어. 그런데 매일 같은 시간에, 아주 잠깐,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가 사라지는 걸 봤어.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도 들렸고. 한참을 지켜보다가 결심했지. 빛이 들어오는 순간, 문 손잡이를 돌리고 열어봤어."
아이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나는 그 안에 숨겨진 무모한 용기에 숨을 삼켰다.
"문이 열리고, 이 낡은 것이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아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치 그 순간의 한기를 다시 느낀 듯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그 시선은 나를 지나쳐, 먼 과거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허공에 머물렀다.
"솔직히, 정말 무서웠어. 이대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른들이 말하던 비참한 최후가 바로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여기서 돌아서면, 나는 평생 이 잿더미 같은 첨탑 꼭대기에서 하얀 안개만 바라보며 살게 될 것 같았어. 그게 더 끔찍했지."
아이는 살짝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래서 눈을 딱 감고, 움직이는 케이블카 안으로 몸을 던졌어. 안으로 뛰어들자마자 문이 닫히고, 그대로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지.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게 환해졌어. 케이블카가 안개의 구름을 뚫고 나온 거야. 내 생에 처음으로… 파란색을 봤어."
바로 그때였다. ‘딩’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케이블카 내부의 낡은 전등이 깜빡거리며 희미한 주황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먼지 쌓인 공간 전체에 낮은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아이는 자리에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 깊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 곧 출발해. 탈 거야?"
마지막 질문. 나는 나의 선택을 되새겼다. 통금, 강의, 정해진 길, 안정적인 미래.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태워버리고 싶다던 나의 고백.
이것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다. 나의 세계를 스스로 부수는 첫 행위였다. 나는 천천히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낡은 케이블카의 차가운 문손잡이를 잡았다.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