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긍정을 확인한 채윤은, 마치 내 마음속의 복잡한 셈법 따위는 이미 꿰뚫어 보았다는 듯 시원스럽게 웃었다.
"거봐. 말이 통한다니까."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남은 요리를 마저 입에 넣었다. 붉은 소스가 가득한 요리였음에도, 그녀의 식사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했다. 소스는 그녀의 입술이나 흰 옷 어디에도 튀지 않았고, 접시 위에는 소스의 붉은 붓 자국만이 정갈하게 남았다. 즉흥적이고 거침없어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행동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능숙함이 배어 있었다. 나와는 다른 종류의, 그러나 분명한 질서였다.
"잘 먹었다."
그녀는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누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설임도, 미련도 없는 명쾌한 기립이었다.
"나 먼저 갈게. 저녁 시간 되기 전에 처리할 게 좀 있어서."
그녀는 의자 뒤에 걸어두었던 가방을 챙겨 멨다. 나는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려 했지만, 그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앉아 있어. 밥 먹은 직후에 급하게 움직이면 체하니까, 이 붉은 맛의 여운을 좀 더 즐기라고."
그녀는 찡긋 눈인사를 하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카운터에 서 있던 그 아이가 그녀를 맞이했다.
"벌써 가게요? 더 있다 가지."
"바빠, 바빠. 다음에 봐."
둘은 짧고 경쾌한 대화를 나누며 웃었다. 나는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아이와 채윤, 두 사람 사이에는 내가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익숙한 리듬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소외감이 예전처럼 차갑거나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계산을 마친 채윤이 문을 열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갈게, 모범생! 다음에 또 보자."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모범생.’
그것은 그 아이가 나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이 도시의 모두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내어 명찰처럼 달아주는 사람은 그 아이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만난 그녀가 나를 그 이름으로 불렀다.
문득 아까의 기억이 스쳤다. 그녀가 합석을 요청했을 때, 그 아이가 나에게 너무 긴장할 필요 없다고 말하며 부른 모범생이라는 명칭.
그녀는 그 짧은 순간에 그 아이가 나를 부르는 호칭을 놓치지 않고 주워 담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그렇게 불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중요한 것은 그 단어가 더 이상 비아냥이나 족쇄처럼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온 ‘모범생’이라는 단어는, 묘하게 경쾌하고 친근한 애칭처럼 느껴졌다.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그녀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문이 열린 틈으로 축축한 안개가 잠시 밀려들어 왔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붉은 열기에 밀려 이내 힘을 잃고 흩어졌다.
나는 덩그러니 남겨진 맞은편의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곳에 존재했던, 태양처럼 뜨겁고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듯했다.
우리는 달랐다.
그녀는 직관으로 움직이고 나는 분석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안개를 찢으며 나아갔고 나는 안개 속에서 길을 더듬었다. 나는 그녀의 무모함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녀 또한 나의 신중함을 답답해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서로가 될 수 없으며,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곧 함께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방금 우리는 같은 식탁에서 같은 붉은 요리를 나누어 먹었다. 서로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씹고 삼켰지만, '맛있다'는 감각의 환희를 공유했다. 나의 좁고 정돈된 식탁 위에 그녀라는 거대하고 낯선 우주가 잠시 내려앉았다가 가는 것. 그 충돌과 교차의 순간이 불쾌하지 않았다.
완전한 타자(他者).
나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나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파괴하지 않고도 내 곁에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 이해하려 애쓰거나 나를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저 서로의 다름을 둔 채로 마주 앉을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것은 내가 안개 밖에서 배운 어떤 지식보다도 더 안도감을 주는 발견이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남기고 간, 붉은 소스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빈 접시를 바라보며 남은 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물맛이 평소보다 달게 느껴졌다.
채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고요는 이전의 적막과는 달랐다. 텅 빈 접시와 물 컵, 그리고 의자의 삐걱거림이 남긴 흔적들 사이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의 상쾌한 공기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가 남기고 간 여운은 생각보다 길고 짙었다.
그때, 인기척과 함께 그 아이가 다가왔다. 아이는 익숙한 손길로 채윤이 비운 접시와 물 컵을 쟁반에 담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나는 접시를 치우는 아이의 손을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정말… 다르더라."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었지만, 아이는 그 뜻을 단번에 알아듣고 피식 웃었다.
"그치? 처음엔 나도 당황했어. 이 도시에서 저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은 처음 봤으니까."
아이는 행주로 테이블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같이 있으면 편해. 우린 서로 너무 달라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일이 없거든. 섞일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억지로 맞추려 애쓸 필요도 없고. 그래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재미있는 친구야."
서로 다르기에 침범하지 않는다. 안전한 친구.
나는 그 아이러니한 말속에서, 내가 방금 느꼈던 안도감의 정체를 확인했다. 우리는 섞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온전하게 공존할 수 있었다.
문득 ‘보색(補色)’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색상환의 정반대 편에 위치하여, 섞이면 서로의 색을 죽여 탁한 무채색이 되지만, 나란히 놓이면 그 어떤 배색보다 서로를 가장 선명하고 강렬하게 빛내주는 관계.
그녀가 펄떡이는 붉은색이라면, 나는 아마도 차갑게 가라앉은 푸른색일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억지로 이해하려 들거나 섞이려 했다면, 우리는 결국 이 도시의 안개처럼 흐릿하고 지루한 회색 덩어리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색으로 존재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거침없는 붉은 직관은 나의 이성을 더욱 또렷하게 비추었고, 나의 정적인 침묵은 그녀의 활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우리는 서로를 침범하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가장 선명하게 완성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테이블 정리를 마치고 쟁반을 허리춤에 끼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맑은 눈동자가 내 안의 빗장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것 같았다.
"너도 이제 알았겠지만, 네 식탁은 생각보다 넓어."
"…내 식탁?"
"응. 혼자서 웅크리고 앉아 접시 하나만 지키기엔 아까울 정도로. 가끔은 그렇게 누군가와 마주 앉아도 괜찮아. 네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네 접시를 뺏어가지 않으니까."
아이는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곤 주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텅 빈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넓었다. 채윤이라는 거대한 타자가 잠시 내려앉았다 갔음에도, 나의 자리는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비로소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나의 세계는 타인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무너질 만큼 허약하지 않았다.
계산대에서 아이와 짧은 눈인사를 나눴다.
"잘 먹었어. 도미 요리… 정말 맛있더라."
"다행이네. 다음에 또 와, 모범생."
그 호칭에 나는 쓴웃음 대신 마주 웃어 보였다. 나는 나무 문을 밀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등 뒤에서 멀어지고, 나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달려들었다. 안개는 여전히, 혹은 아까보다 더 짙게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붉은색과 나무색으로 가득했던 식당 안과는 완벽하게 단절된, 질식할 듯한 흰색의 세계. 건물의 윤곽은 흐물거렸고, 가로등 불빛은 안개에 먹혀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습관처럼 옷깃을 여미려던 나는 손을 멈췄다. 춥지 않았다. 안개의 한기가 겉옷을 뚫고 피부에 닿았지만, 그것이 내 안으로 스며들지는 못했다. 뱃속 깊은 곳, 방금 삼킨 붉은 요리가 거대한 난로처럼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태양의 맛’이, 내 혈관을 타고 돌며 온몸을 데우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포만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내 의지로 선택하고, 낯선 타인과 부딪히며 씹어 삼킨 ‘생명력’이었다. 내 안의 붉은 열기는 눅눅한 안개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단단한 방어막이 되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에서 여전히 곰팡이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났지만, 그 끝에는 희미하게 토마토와 허브의 잔향이 묻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인지, 혹은 하교 시간인지, 거리에는 수많은 흰색 실루엣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숙이고,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들. 초점 없는 눈동자들. 예전의 나였다면 그들을 보며 숨이 막히거나, 나 역시 저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저 두꺼운 흰색 코트 아래, 저 무표정한 가면 뒤에, 어쩌면 그들도 각자만의 굶주림을 숨기고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뱃속에 채워지지 않은 허기를 안고, 누군가는 터져 나오지 못한 비명을 삼키며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아이가 말했던 ‘작은 틈’이나 ‘샛강’을 찾지 못해, 그저 이 거대한 흐름에 떠밀려가고 있을 뿐인 건 아닐까.
나는 그들에게서 묘한 연민과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그들의 흐름으로 끌어당기는 자력이 아니라, 그들과 나를 구분 짓는 명확한 경계선 위에서 피어나는 감정이었다. 나는 그들 속에 섞여 있었지만, 더 이상 그들의 일부가 아니었다. 채윤이 나와 섞이지 않고도 내 앞에 앉아 있었듯이, 나 또한 이 안개 낀 도시와 섞이지 않고도 이곳에 존재할 수 있었다.
도시라는 거대한 타자(他者).
이 흰색 세계는 영원히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나에게 끊임없이 획일성을 강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이 도시를 사랑할 수는 없어도, 이 도시 안에서 나만의 맛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다는 것을.
나는 걸음을 옮겼다.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보지 않고, 시선을 들어 흐릿한 가로등 너머를 보았다. 나의 보폭은 남들보다 조금 느리거나, 혹은 조금 빨랐다. 때로는 흐름을 거슬러 멈춰 서기도 했다. 엇박자로 울리는 내 구두굽 소리가 안개 속으로 퍼져나갔다.
‘모범생’
그래, 나는 모범생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도시가 정해준 답안지를 베끼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나는 나만의 식탁을 차리고, 나만의 메뉴를 고르며,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들과도 기꺼이 마주 앉을 준비가 된, 내 인생이라는 과목의 성실한 탐구자였다.
뱃속의 붉은 열기가 다시 한번 울렁거렸다. 힘이 났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안개 낀 거리를 유유히 걸어 나갔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안개를 아주 잠시 흩트려놓았고, 그 틈으로 내가 가야 할 샛길이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길로 방향을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