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안개의 농도는 옅어졌다 짙어지기를 반복했지만 도시의 채도는 여전히 제로에 수렴하는 무채색이었다. 하지만 나의 저녁은 달랐다. 해가 지고 거리의 가로등이 희미하게 깜빡이기 시작하면, 나의 하루는 비로소 진짜 시작을 알렸다.
‘딸랑-’
이제는 내 심장 박동만큼이나 익숙해진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자마자 밀려오는 온기. 밖의 서늘한 습기와는 차원이 다른, 훈훈하고 맛있는 냄새가 밴 공기가 나를 안아주듯 감쌌다. 차가웠던 뺨에 훅 하고 훈기가 끼쳤다. 나는 옷깃에 묻은 자잘한 물기를 툭툭 털어내며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어, 모범생! 오늘 좀 늦었네?”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채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미 중앙의 넓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붉은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교수님이 프로젝트 마감을 앞당기는 바람에요. 다들 먼저 와 있었네요.”
나는 겉옷을 벗어 문가의 옷걸이에 걸며 대답했다. 예전 같았으면 구석의 작은 2인용 테이블로 숨어들었겠지만, 이제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모여 있는 중앙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에는 채윤 외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몇 더 있었다.
“어서 와요, 학생. 오늘따라 안개가 지독하더군요. 오는데 고생 좀 했겠어요.”
중후한 목소리로 나를 반겨준 것은 희끗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문기석 씨였다. 그는 이 도시의 건축 설계국에서 일하는 건축가였다. 평생을 규격화된 흰색 건물을 짓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왔지만, 퇴근 후 이곳에서는 가장 다채로운 미식과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안경 너머로 지적인 눈빛을 빛내며 내게 샐러드 접시를 살짝 권했다.
“이거 좀 들어봐요. 오늘 사장님이 구한 올리브가 아주 일품입니다. 오일과 허브의 밸런스가 절묘해서, 재료 본연의 신선함이 입안에서 그대로 느껴지더군요.”
그의 표현은 언제나 과장 없이 정갈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대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그의 태도는 내가 훗날 도달하고 싶은 어른의 모습 그 자체였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배고팠어요.”
나는 사양하지 않고 포크를 들었다.
내 옆자리에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묶은, 나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이는 여학생이 스케치북을 펴놓고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녀, 하림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지만, 이 도시의 대학에서 미술은 오직 ‘산업 디자인’이나 ‘설계’를 위한 하위 기능으로만 존재했다.
“기능이 없는 선은 쓰레기래.”
언젠가 그녀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효율성과 기능성이 제거된, 오직 아름다움만을 위한 선과 색은 허용되지 않는 잉여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곳에 와서 기능과는 상관없는, 오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드로잉을 하곤 했다.
“오빠, 방금 들어올 때 표정 진짜 묘했는데. 안개 묻은 채로 멍하니 서 있는 거, 다시 해주면 안 돼요? 분위기 있어서 그리기 딱 좋았는데.”
“야, 밥 먹는데 무슨 모델 타령이야.”
내가 짐짓 핀잔을 주자, 테이블 위에 낮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이 평범하고 소란스러운 저녁. 잿더미 같던 내 일상에 스며든 기적 같은 풍경이었다. 채윤과 나, 그리고 그 아이 셋뿐이었던 저녁 식사 자리는, 식당에서 만나게된 여러 사람들로 인해 조금씩 북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거대한 흰색 벽에서 자신만의 작은 균열을 발견한 이들이었다. 정해진 길을 걷다 잠시 샛길로 빠져나온 사람들. 우리는 서로의 직업이나 나이를 묻기보다는, 오늘 먹은 음식의 맛과 창밖으로 아주 잠깐 비쳤던 노을의 색깔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문은?”
주방에서 나온 그 아이가 내 앞에 물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여전히 맑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 하지만 처음 보았을 때 나를 꿰뚫어 보던 그 날카로운 직관 대신, 이제는 제법 익숙한 편안함과 온기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녀석은 허리춤에 댄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 오늘은 뭐가 좋을까. 뇌를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지 좀 묵직하고 따뜻한 게 당기는데.”
“그럼 ‘구황작물 비프 스튜’ 어때? 오늘 아침부터 끓인 거야. 감자랑 당근이 입에서 녹을 정도로 푹 익었어. 색깔은… 아주 짙고 깊은 갈색.”
아이는 메뉴를 설명할 때마다 눈을 반짝였다. 그가 묘사하는 ‘색’은 언제나 내 식욕을 자극하는 최고의 애피타이저였다.
“좋아. 그걸로 줘. 빵도 같이.”
“오케이. 금방 줄게.”
아이가 주방으로 돌아가자, 채윤이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많이 변한 거 알아?”
“내가?”
“응. 처음에 여기 왔을 땐, 꼭 깨지기 직전의 유리병 같았거든. 흰색 물감 칠해진 유리병. 건드리면 쨍 하고 깨지거나, 아니면 속에 있는 붉은 게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아슬아슬했지. 근데 지금은….”
그녀는 와인 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골랐다.
“그냥 튼튼한 토기 그릇 같아. 어떤 색을 담아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표정도 훨씬… 살아있고.”
“살아있다라….”
나는 물 잔을 만지작거리며 그 말을 곱씹었다.
살아있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감각이었다. 안개 밖으로 나가 파란 하늘을 보았을 때 느꼈던 그 폭발적인 해방감도 ‘살아있음’이었지만, 지금 이 식당 안에서 느끼는 감각은 조금 달랐다. 그것은 은은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같았다.
“이젠 밖에서도 숨 쉬는 게 덜 힘들어.”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전엔 학교에 있거나 거리를 걸을 때면,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어. 나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 들키면 끝장이라는 공포…. 그런데 요즘은 그냥, 그것도 내 일부라고 생각해. 흰색 코트를 입은 나도 나고, 여기서 붉은 스튜를 먹는 나도 나니까. 안개 속을 걸을 땐 안개에 맞는 보폭으로 걷고, 여기선 내 보폭으로 걷는 거지. 샛강을 찾았으니까, 본류(本流)에 섞여 흘러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더라고.”
내 말에 기석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지. 우리에겐 여기가 베이스캠프 같은 곳 아니겠나.”
“베이스캠프. 좋네요, 그 말.”
스케치북을 덮으며 여학생이 키득거렸다.
그때, 주방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흙 내음을 머금은 구황작물의 묵직한 향과, 오랜 시간 졸여진 고기의 진한 육향이 어우러진 냄새였다. 아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자, ‘구황작물 비프 스튜’.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검붉은 빛이 감도는 짙은 갈색의 스튜. 그 위로 선명한 자줏빛 껍질채 있는 고구마와 노란 감자가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구석구석 밤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고, 주인공인 소고기도 뭉텅뭉텅 썰려 듬뿍들어 있었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이제는 망설임도, 긴장도 없었다. 오직 기대감만이 혀끝을 간질였다. 한 숟가락 가득 떠서 입에 넣었다.
뜨겁고, 뭉근하며, 깊은 맛.
입안에서 채소들이 부드럽게 허물어지며 대지의 맛을 뿜어냈다. 도시의 차가운 인공미와는 정반대 편에 있는, 투박하지만 확실한 위로의 맛이었다.
“어때?”
그 아이가 물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맛을 음미하다가, 천천히 눈을 뜨며 웃어 보였다.
“완벽해. 오늘 나한테 딱 필요한 색깔이야.”
나의 대답에 아이도, 채윤도, 그리고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미소를 지었다. 식당 안은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와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소리로 가득 찼다. 창밖에는 여전히 도시의 허락된 유일한 색인 흰색 안개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 낡은 나무 문 안쪽은 그 어떤 세상보다 다채롭고 선명한 색들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빵을 뜯어 스튜 국물에 푹 찍었다. 짙은 갈색으로 물든 빵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모범생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만의 답안지를 써 내려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이, 내일 다시 그 건조한 흰색 세계를 버티게 할, 아니 ‘살아가게’ 할 가장 든든한 연료가 되어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식사는 끝났지만, 온기는 오래도록 머물렀다. 밤이 깊어지자 테이블을 채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오늘 밸런스는 정말 완벽했군요. 내일 설계 도면은 꽤 안정적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
기석 아저씨가 중절모를 집어 들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문을 열기 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다시 도시의 완벽한 부품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의 뒷모습에서는 시스템에 순응하면서도 결코 자신을 잃지 않는 어른의 품위가 느껴졌다. 하림 역시 스케치북을 가슴에 품고 일어섰다.
“저도 가볼게요. 오늘 영감 많이 얻었어요. 아, 오빠. 다음엔 그 멍한 표정 말고 좀 웃고 있어 봐요. 그게 더 그리기 재밌으니까.”
그녀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채윤이 와인 잔에 남은 마지막 붉은 방울을 털어 넣고 일어났다.
“나도 가야겠다. 오늘 에너지는 다 채웠으니까, 내일은 또 신나게 부딪혀 봐야지. 갈게, 모범생! 너도 수고해라.”
채윤은 나에게 윙크를, 그 아이에게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왁자지껄하던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식당 안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적막이 아니었다. 타인들이 남기고 간 온기와,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설거지 소리, 그리고 아직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음식 냄새가 어우러진, 충만하고 평화로운 고요였다.
나는 텅 빈 홀에 홀로 남았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는 비어있었지만, 내면은 그들로 인해 확장된 기분이었다. 나는 식은 차를 마시며 그 여운을 즐겼다. 그 아이는 묵묵히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행주가 지나간 자리마다 나무 테이블이 은은한 광택을 되찾았다. 녀석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주방 커튼 너머에서는 사장님이 무언가를 다듬는 규칙적인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지 않는 곳, 불과 칼이 춤추는 그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내 심장 박동처럼 편안했다.
이대로 문을 닫을 시간까지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딸랑-’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이번 종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공명음이 아니라, 무언가에 가로막혀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보았다. 문이 열린 틈으로 밤의 안개가 뱀처럼 스르르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개를 찢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키가 컸고, 말랐으며, 지나치게 단정했다. 이 도시의 규격인 흰색 옷을 입고 있었지만, 채윤의 옷이 자유로운 캔버스 같았고 내 옷이 평범한 유니폼 같았다면, 그의 옷은 마치 강철로 짠 갑옷처럼 보였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림질 된 옷깃,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채워진 단추,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구두. 그는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듯 공간을 점유하며 들어왔다.
그의 등장과 함께 식당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변했다. 훈훈하던 온기에 찬물을 끼얹은 듯 서늘한 기류가 흘렀다. 테이블을 닦던 그 아이의 손길이 아주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주방의 칼질 소리마저 순간적으로 리듬을 잃은 듯했다.
남자는 자리에 바로 앉지 않고, 선 채로 식당 내부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메뉴판의 다채로운 음식 사진이나 따뜻한 조명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낡은 나무 바닥의 틈새, 제각각인 의자의 모양,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규칙한 연기를 스캔하듯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호기심이나 감탄 대신, 무질서를 향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그것을 분석하려는 차가운 이성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오작동하는 기계를 바라보는 엔지니어의 눈빛이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와, 내 테이블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굳이 비어있는 다른 넓은 자리들을 두고, 내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앉은 것은 우연일까. 그가 의자를 빼내 앉는 동작은 기계처럼 절도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그 아이가 물 잔과 메뉴판을 들고 다가갔다. 평소의 편안한 미소 대신, 녀석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남자는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은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메뉴는 보지 않으십니까?”
아이가 물었다. 남자는 안경을—그는 금속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검지로 치켜올리며, 건조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가장 효율적이고, 자극적이지 않은 걸로 주십시오. 재료 본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섞이거나, 과도한 향신료가 들어간 건 사절합니다.”
그 아이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이 식당의 정체성, 즉 본능과 감각을 자극하는 요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주문이었다.
“저희 가게는 향신료를 주로 사용합니다만.”
“압니다. 냄새가… 소란스럽더군요.”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코앞의 공기를 손으로 휘저었다. 마치 악취라도 쫓아내는 듯한 동작이었다.
“흰 쌀밥과, 간을 거의 하지 않은 채소 볶음이면 됩니다. 가능합니까?”
그것은 부탁이 아니라 지시였다. 아이는 잠시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남자는 홀에 혼자 남게 되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찻잔을 든 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안개처럼 희뿌연 회색이었다. 채윤의 눈이 햇살을 담고 있고, 기석 아저씨의 눈이 숲을 담고 있다면, 그의 눈은 오직 도시의 ‘규율’만을 담고 있는 듯했다.
“학생입니까?”
그가 대뜸 물었다. 예의를 갖춘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상대를 하대하는 듯한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네.”
“늦은 시간이군요. 기숙사 통금 시간까지 복귀하려면 서둘러야 할 텐데. 효율적인 동선을 생각하면 지금쯤 일어나야 맞지 않습니까?”
나는 당황했다. 초면에, 그것도 식당에서 만난 타인에게 통금과 효율성을 논하다니. 내 안의 경고등이 켜졌다. 그는 기석 아저씨처럼 조언을 하는 어른이 아니었다. 그는 통제하려는 자였다.
“제 시간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하지만 선을 그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쯧, 하고 찼다.
“알아서 한다라. 그게 가장 위험한 생각이죠. 시스템이 정해둔 궤도를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그저 ‘방종’일 뿐입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며 불필요한 감각을 탐닉하는 것이, 당신의 미래에 어떤 효용이 있습니까?”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내 빈 그릇—붉은 스튜의 흔적이 남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경멸 어린 시선이었다.
“붉은색이라. 지나치게 자극적이군요. 과도한 자극은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이 도시에 흰색외의 색을 지양하게된 이유를 아직도 모르나 봅니다.”
숨이 막혔다. 식당 안을 채우고 있던 훈훈한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단순히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안개를 뚫고 도망쳐온 그 ‘도시의 논리’ 그 자체였다.
아니, 안개보다 더 적극적이고 집요한 형태의 억압이었다. 채윤과는 달랐다. 채윤은 나와 다르기에 나를 비춰주는 보색(補色)이었지만, 이 남자는 나와 다르기에 나를 지워버리려 하는, 섞일 수 없는 기름이자 덮어버리는 페인트였다.
“정도원(鄭道元)입니다. 시청 감사국에서 일하죠.”
그가 명함을 건내며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바를 정, 길 도, 으뜸 원. ‘바른길이 으뜸’이라. 이름조차 숨 막히게 올바르고 강압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 공간에 존재하는 무질서와 낭비를 바로잡으러 온 심판관이라도 되는 양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여긴… 위생 상태부터 시작해서 점검해야 할 게 많아 보이더군요. 특히 저 주방.”
그는 커튼이 쳐진 주방 쪽을 쏘아보았다. 불과 칼이 춤추는 그 깊은 곳을 그는 ‘비위생’과 ‘무질서’로 규정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가 지금 모독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었다. 나의 해방구, 나의 샛강, 그리고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안식처였다.
그때, 주방 커튼이 걷히며 사장님이 쟁반을 들고 나왔다. 평소의 넉넉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굳게 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눈빛이 그를 향해 있었다.
쟁반 위에는 남자가 주문한 대로,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은 흰 채소 볶음과 흰 쌀밥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색이 제거된, 죽어있는 음식. 그것은 사장님이 내놓을 수 있는 요리가 아니었지만, 동시에 그 남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주문하신 식사입니다.”
사장님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서릿발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정도원은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그래요. 이게 맞지.”
그가 수저를 드는 순간, 나는 느꼈다. 이 작은 식당의 평화로운 저녁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될 것임을. 흰색 갑옷을 입은 침입자가, 우리의 다채로운 식탁을 위협하고 있었다. 나는 스튜의 남은 온기가 사라져가는 빈 그릇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