윕홀

by 루트

정도원이 숟가락을 들어 그 무채색의 채소 볶음을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씹어 삼키는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이 공간이 지켜온 색채와 생명력을 부정하는, 지극히 건조하고 효율적인 행위였다.
​그때였다. 내 어깨 위로 묵직하고 투박한 손 하나가 얹어졌다. 사장님이었다.

​"학생."

​사장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호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나를 향한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만 일어나 봐. 시간이 늦었어."

​"하지만, 사장님… 저 사람은…."

​"알아. 하지만 지금은 자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통금 시간 늦으면 곤란해지잖아.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어서 가."

​사장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나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파편이 튈지 모르는 현장에서 나를 보호하려는 어른의 악력이었다.

주방 앞에 서 있던 그 아이 역시 나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라는 눈빛이었지만, 녀석의 쥔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현명한 판단이군요."

​정도원이 식사를 멈추지 않은 채, 씹던 것을 삼키며 건조하게 끼어들었다.

​"불필요한 마찰은 비효율의 극치니까. 학생, 돌아가는 길에 본인의 궤도를 다시 한번 점검해보길 바랍니다. 무엇이 당신을 위한 '바른길'인지."

​그의 말은 충고가 아니라 명백한 경고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정을 앞세워 대들기엔, 저 남자가 가진 '흰색의 권위'가 너무나 견고해 보였다.
나는 등 떠밀리듯 가방을 챙겨 문을 향했다.

​'딸랑-'

​들어올 때는 경쾌했던 종소리가, 나갈 때는 둔탁한 파열음처럼 들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안개가 내 몸을 덮쳤다.
조금 전까지 식당 안에서 느꼈던 온기는 순식간에 증발했고, 닫힌 문 너머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저 남자는 대체 누구이며, 왜 우리를 적대하는 걸까.
​나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안에서 들려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두꺼운 나무 문은 내부의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막막했다. 샛강을 찾았다고, 나만의 길을 찾았다고 자부했지만, 도시의 시스템이 작정하고 들이닥치니 나는 다시 안개 속에 갇힌 무력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걱정 말게."

​안개 속에서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중절모를 쓴 실루엣이 보였다. 기석 아저씨였다.
그는 떠나지 않고 가게 앞을 지키고 있었다.

​"아저씨… 가신 줄 알았는데요."

​"가려고 했지. 그런데 불청객이 들어가는 걸 보고 발길을 돌릴 수가 없더군."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굳게 닫힌 식당 문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안에서 쫓겨난 게 억울한가?"

​내 마음을 꿰뚫은 듯한 질문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억울하기보다는, 비겁하게 느껴져요. 다들 안에 있는데 저만 이렇게 도망치듯 나온 게."
​"도망친 게 아니야. 보호받은 거지."

​기석 아저씨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다.

​"사장님이 자네를 내보낸 건, 자네가 짐이라서가 아닐세. 아직 준비되지 않은 자네가 저 날 선 칼날에 다칠까 봐 배려한 거야. 그게 어른의 역할이지."

​"하지만… 저 남자는 위험해 보였어요. 식당이 어떻게 될까 봐…."

​"정도원. 그 남자는 위험한 게 아니라, 너무 단단한 걸세."

​기석 씨가 나직하게 말했다. 마치 그 이름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시는 분인가요?"

​"개인적인 친분은 없네. 그저 이름 석 자 정도 알고, 오다가다 한두 번 마주친 게 다야."

​기석 아저씨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하지만 건물을 짓다 보면 사람을 보는 눈도 구조를 보는 눈이랑 비슷해지거든. 그는... 빈틈도 없고, 유도리도 없어. 마치 철근 콘크리트로만 지어진 요새 같지. 우리처럼 나무 냄새나 흙냄새가 나는 공간을 보면, 그는 그걸 '부실 공사'라고 생각해. 그래서 바로잡으려 드는 거고."

​"그게 잘못된 거잖아요. 우리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건데."

​"맞아. 하지만 그에게 그걸 설명하기엔,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아."

​기석 아저씨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학생. 때로는 물러서서 지켜보는 것도 싸움의 일부야. 지금 자네가 안에서 감정적으로 맞선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없어. 오히려 도원에게 꼬투리만 잡힐 뿐이지."

​그는 잠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사장님과 그 아이는 자네를 보호하기로 '선택'했네. 그들이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나선 거야. 그렇다면 자네가 할 일은 그들의 선택을 훼손하지 않는 걸세. 불안해하며 억지로 끼어드는 대신, 그들이 잘 해낼 거라 믿고 기다려주는 것. 때로는 그게 가장 깊은 형태의 존중이 되기도 하네."

​존중.

믿고 기다려주는 것. 나는 닫힌 문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내가 나서서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 또한 어쩌면, 그들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나의 오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 이 식당은 생각보다 기초가 튼튼하니까. 쉽게 무너지지 않아.”

​기석 씨의 단단한 목소리에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나에게 눈짓을 했다.

​"가게. 통금 시간 늦겠어. 내일 다시 와보면 알게 되겠지."

​"…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안개 낀 거리를 걸어가며,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서 있는 기석 아저씨의 실루엣과, 굳게 닫힌 낡은 나무 문이 안개 속으로 점점 멀어졌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똑같은 흰색 풍경이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붉은 스튜가 주었던 포만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묵직한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정도원의 차가운 눈빛. 사장님의 단호한 손길. 그리고 기석 씨의 '기다리라'는 조언.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바닥에 남은 사장님의 온기를 상기했다.
그래, 오늘은 물러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닐 것이다.

나의 샛강을 위협하는 저 흰색 벽에 대해,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저들을 지키고 싶다면, 덮어놓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저 흰색 벽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로 들어왔다.
오늘 밤은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강의가 끝나자마자 달려간 식당의 풍경은 참담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붙은 메뉴판이었다.

[열 가지 향신료 카레], [붉은 소스를 곁들인 도미 요리], [구황작물 비프 스튜]….
내가 사랑했던 메뉴들의 이름 위로 차가운 흰색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침묵을 강요당하는 모습 같았다.

"왔나."

주방에서 나온 사장님은 평소보다 지친 기색이었다. 가게 안에는 그 특유의 향신료 냄새 대신, 맹물 끓이는 냄새 같은 무미건조한 수증기만 감돌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계도 기간이라더군."

사장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흰색 테이프가 붙은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시청 위생과에서 정식 공문이 내려왔어. '과도한 향신료 사용 및 비표준 조리법에 대한 시정 명령'. 앞으로 2주 동안 그들이 지정한 '표준 레시피'를 따르지 않으면 영업 정지를 당한다고 하네."

사장님은 결국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한 발 물러서는 쪽을 택한 듯했다. 가게 문을 닫게 할 수는 없다는, 식당을 지키려는 가장(家長)으로서의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주방 한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 아이의 표정은 달랐다.
아이의 앞에는 수많은 식재료와 노트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녀석은 흰색 테이프가 붙은 메뉴판을 노려보며 볼펜을 딱딱거리고 있었다.

"시늉만 해서는 안 돼."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 눈빛은 순응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꽉 막힌 현실의 틈새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가능한 최선의 수를 찾아내려는 치열한 계산이었다.

"향신료를 못 쓴다면 재료를 볶는 시간을 조절해서 풍미를 낼 수 있을지 몰라. 붉은색이 안 된다면, 갈색이 날 때까지 양파를 볶아서 깊은 맛을 내면 돼.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우리 색깔을 지킬 방법… 분명히 있을 거야."

아이는 주어진 제약 안에서 어떻게든 '맛'을 지켜내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노트에도 엑스 표만 늘어갈 뿐,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았다.
물리적인 한계가 너무 명확했다.

"…저도 좀 알아볼게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들이 내세운 '표준'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 그 규정에 정말 빈틈은 없는지. 제가 가장 잘하는 게 그거니까요."

나는 식당을 나와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의 샛강을 지키기 위해, 나는 다시 거대한 흰색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도서관 자료실.
나는 관련 법령집과 규정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읽어 내려갔다.
예전의 나였다면 정해진 답을 찾기 위해 편안하게 읽었을 활자들이, 지금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시민의 정서적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 '효율적인 영양 섭취를 위한 표준'.

책을 뒤적일수록 내 손끝은 갈 길을 잃었다.
명확한 기준이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그곳에 적힌 문장들은 지나치게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다.

'정서적 안정'의 기준은 무엇인가? '효율성'은 누가 판단하는가?

문제는 이 모호함이 나의 무기가 아니라 그들의 무기라는 점이었다. 해석의 권한을 가진 자가 '이것은 비효율적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이 곧 법이 되는 구조였다.
노트에 몇 가지 반론을 적어보았지만, 스스로 보기에도 빈약했다.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로는 정도원이라는 그 단단한 벽에 흠집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활자들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춤을 췄다. 나는 도망치듯 열람실을 빠져나왔다.
도서관 앞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막막했다.

"어라? 모범생, 표정이 왜 그래? 누가 보면 세상 짐 다 짊어진 줄 알겠네."

톡 쏘는 듯한 목소리. 고개를 들자, 자판기 옆에서 캔 커피를 따고 있는 채윤 누나가 보였다.
그녀는 선명한 붉은색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도 그녀만 뚜렷한 색채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채윤 누나…."

"식당 다녀왔구나? 거기 지금 분위기 살벌하던데."

그녀는 내 옆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커피를 건넸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머리 좀 식히려고요. 법전이랑 규정집을 뒤져봤는데… 소득이 없네요. 뭔가 꽉 막힌 느낌이에요. 논리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도서관에서의 허탕을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듣던 누나는 캔 커피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논리라…."

그녀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던졌다.

​"근데 그 사람, 좀 특이하지 않아?"

​"네? 정도원 그 사람이요? 특이하긴 하죠. 꽉 막혀서 말이 안 통하니까."

​"아니, 내 말은… 그 사람의 태도 같은 거 말이야."

​채윤 누나는 캔 커피를 따며 기억을 더듬듯 말했다.

​"어제 내가 가게 나오고 나서 바로 마주쳤거든.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키 크고 깐깐해 보이는 남자, 그 사람 맞지?"

​아, 그랬구나. 시간대상 누나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들어왔으니, 입구에서 마주쳤을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흰색 정장 입은 사람."

​"그래, 그 사람. 근데 좀 이상했어. 보통 단속하러 온 공무원들은 당당하게 문 열고 들어가잖아? 근데 그 사람은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더라고."

​누나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누구를 기다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낡은 나무 문손잡이를 노려보고 있었어. 마치… 저걸 잡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손잡이를 잡으려다가 말다가, 심호흡도 한 번 크게 하고…. 뭐랄까, 되게 '불안해' 보였달까?"

​"불안해 보였다고요?"

​"응. 꼭 알레르기 있는 사람이 먼지 구덩이로 들어가기 직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았어. 화가 난 게 아니라, 오염될까 봐 겁내는 사람처럼."

​누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내 느낌이야. 겉으로는 엄청 강하고 빈틈없어 보이려고 힘주고 있는데, 사실은 작은 얼룩 하나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결벽증 환자 같았어. 문고리 하나 잡는 것도 그렇게 힘들어해서야 원.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구는 건, 보통은 겁이 많다는 뜻이거든."

​불안. 예민함. 결벽증.

누나의 말은 그저 지나가는 목격담 같았지만,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정도원을 나를 억압하는 '강력한 권력자'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논리를 깨부수려 했다.
하지만 누나의 눈에 비친 그는, 가게 문을 열기 전 문고리를 잡은것조차 망설이는, 한 명의 강박적인 인간일 뿐이었다.

​'마치 철근 콘크리트로만 지어진 요새 같지.'

​어제 기석 아저씨가 했던 말이 오버랩되었다.
빈틈도 없고 유도리도 없는 요새.
하지만 그렇게까지 견고한 요새를 지었다는 건, 역설적으로 그 안에 가장 취약하고 여린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 아닐까?
​가장 단단한 벽은,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니까.
​채윤 누나의 말대로 그가 '불안'해서 그렇게 단단한 벽을 쌓은 것이라면, 그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요새 안에 감추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이 싸움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기석 아저씨."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이름이 튀어나왔다.

​"응? 기석 아저씨?"

​"맞아요. 아저씨라면 알지도 몰라요. 정도원이라는 사람이 쌓아 올린 그 '흰색 요새'의 설계도를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향이 잡히는 것 같았다.

법전에 적힌 글자가 아니라,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이 만든 구조를 봐야 했다.

​"고마워요, 누나. 덕분에 생각이 좀 정리됐어요."

​"오, 뭐야. 나 꽤 결정적인 힌트를 준 거야? 그냥 느낌대로 말한 건데."

​누나가 킬킬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가봐. 가서 답 좀 찾아와라. 나도 밍밍한 채소 볶음 말고 붉은 스튜 다시 먹고 싶으니까."

​나는 누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 목적지는 도서관이 아니었다. 도시 설계국, 기석 아저씨가 퇴근길에 늘 지나치는 그 길목이었다.

나는 도시 설계국 근처, 기석 아저씨가 퇴근길에 종종 머무른다는 오래된 옹벽 앞으로 달려갔다.
안개가 자욱한 거리, 매끈한 신식 건물들 사이에서 유독 투박하고 거친 질감을 드러내고 있는 그 벽 앞에, 중절모를 쓴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내 부름에 기석 아저씨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손에 작은 손전등을 쥐고 벽의 아랫부분을 비춰보고 있었다.

​"어, 학생이군.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인가? 숨이 턱 끝까지 찼구먼."

​"여쭤볼 게 있어서요. 급하게 도움이 필요해서…."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채윤 누나가 했던 말을 쏟아냈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아저씨는 손전등을 끄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 낡은 벽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아가씨군. 그 짧은 순간에 본질을 꿰뚫어 보았어."

​"본질이라니요?"

​"이리 와서 이걸 좀 보게."

​아저씨는 손전등으로 옹벽의 중간중간 뚫려 있는 작은 구멍들을 비췄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낡은 파이프 구멍들이었다.

​"이게 뭔지 아나?"

​"…배수구 아닌가요?"

​"맞네. 건축 용어로는 '윕 홀(Weep Hole)', 말 그대로 '눈물 구멍'이라고도 부르지."

​아저씨는 벽의 거친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완벽주의자들의 눈에는 이 구멍이 거슬릴 거야. 매끈한 벽에 뚫린 흉터 같고, 저기로 벌레나 흙탕물이 새어 나오니까 지저분해 보이지. 시멘트로 이 구멍들을 꽉 막아버리곤 싶어하지. 완벽한 밀실을 만들고 싶은 거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구멍을 막는 순간, 이 벽은 시한폭탄이 되네. 비가 오면 벽 뒤의 흙에 물이 차오르는데,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수압이 엄청나게 높아지거든. 결국 그 단단한 콘크리트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거야. 이 벽이 수십 년을 버틴 건, 단단해서가 아니라 이 구멍들로 물을 흘려보냈기 때문이야."

​"물을… 흘려보냈기 때문이라고요."

​"그래. 정도원이 식당에서 느꼈던 공포는 바로 그거야. '터질 것 같은 압력'."

​기석 아저씨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라는 요새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모든 구멍을 막아버렸어. 하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을 걸세. 자신의 내면에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수압이 한계치까지 차올랐다는 걸. 그런데 우리 식당은 어떤가? 시끄럽고, 냄새나고, 감정들이 제멋대로 흘러나오지. 거긴 도시의 거대한 '위프 홀'이야."

​아저씨의 말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정도원이 식당에 들어왔을 때 보였던 그 예민한 반응.
그것은 단순히 더러운 것을 피하려는 행동이 아니었다.
자신은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그 '배출구'가 적나라하게 열려 있는 공간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내벽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그는 그 배출구가 두려운 거야.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 자신의 매끈한 벽을 더럽힌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비위생'이니 '비효율'이니 하는 딱지를 붙여서 그 구멍을 시멘트로 메워버리려 하는 거지. 그래야 안전하다고 믿으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 사람의 벽을 부숴버려야 하나요?"

​내가 주먹을 쥐며 묻자,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그는 수압이 꽉 찬 댐과 같아. 억지로 부수려 들면 댐이 터지면서 너희까지 휩쓸려 갈 걸세. 공포에 질린 사람은 공격받으면 더 필사적으로 구멍을 막으려 들지."

​아저씨는 다시 옹벽의 작은 물구멍을 가리켰다.

​"벽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야. 이 작은 구멍 하나가 벽을 오히려 '살리는' 것이라는 걸 증명하면 되네."

​"살린다고요?"

​"그래. 안심시켜주게. 자네들의 식당이 도시를 오염시키는 균열이 아니라, 도시가 무너지지 않게 압력을 빼주는 '숨구멍'이라는 걸. 당신의 견고한 세계는, 이 작은 배출구 하나를 허용함으로써 비로소 안전해질 수 있다고."

​안심시킨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를 안심시킨다는 발상.
정도원은 적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배출구 없는 옹벽 뒤에서 팽창하는 수압에 떨고 있는, 붕괴 직전의 기술자였다.

​"아…."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길이 보였다.
도서관에서 찾았던 법조문들이 아니라, 식당의 주방에서 그 아이가 고민하던 것들.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우리 색깔을 지킬 방법.'

그것은 단순히 맛을 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도원이라는 사람에게 '안전하게 압력을 해소하는 법'을 제안하는 협상이었다.

​"감사해요, 아저씨.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 가서 자네만의 '물구멍'을 보여주게."

​나는 기석 아저씨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뒤를 돌았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 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방법을 알 것 같아. 지금 바로 식당으로 갈게. 다시 시작하자.]

​안개 속을 달리는 나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붉은색으로 뛰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정도원의 '흰색 요새'가 두렵지 않았다.
그 요새에는, 배수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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