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by 루트

식당은 따뜻했다. 달콤한 설탕 실타래와 초콜릿 낙서는 하림의 마음에 작은 윕 홀을 뚫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구멍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하림이 식당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차가운 안개와 기능만을 강요하는 학교, 그리고 아마도 집일 터였다. 식당이 언제까지나 그녀의 유일한 도피처가 될 수는 없었다. 며칠 전 그녀가 보였던 '죽은 눈'은 식당이 부재할 때 그녀가 겪을 붕괴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나에게 샛강은 숨을 쉬기 위한 틈이었지만, 하림에게는 생존 그 자체였다. 나는 내가 겪었던 방황보다 더 깊고 어두운 터널 속에 그녀가 있음을 직감했다.

​"하림아."

​그녀가 초콜릿이 묻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서려 할 때, 나는 그녀를 불렀다.

​"잠깐 시간 괜찮으면, 좀 걷다 갈래?"

​하림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식당을 나와 안개 낀 거리를 걸었다. 식당 문이 닫히는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던 달콤한 온기가 칼로 베어낸 듯 사라졌다.
다시 안개였다.
폐부로 밀려드는 습한 공기는 조금 전 혀끝에서 녹았던 설탕의 기억을 조롱하듯 차갑고 무거웠다.

하림은 걷고 있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목이 매인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안개는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은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늘려 하수구 구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헐렁한 후드 티셔츠가 유난히 얇아 보였다. 그것은 이 도시의 규격에 맞지 않는, 잉여의 천 조각처럼 펄럭거렸다.

"하림아."

나는 그녀를 불렀다. 내 목소리는 안개에 막혀 눅눅하게 퍼졌다.

"학교는...학교 다니는 건 괜찮아?"

가장 묻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물어야만 했던 질문.
하림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엇박자를 탔다.

"...괜찮지 않아도 다녀야죠."

그녀의 대답은 저장된 말을 되풀이하는 자동응답기처럼 건조했다.

"부모님이 원하시니까. 교수님이... 그게 맞다고 하니까."

"네 그림을 보여드렸어?"

"보여드렸죠. 쓰레기래요."

하림이 멈춰 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기능이 없대요. 도시의 효율을 저해하고, 합리적이지 않대요. 엄마는 제 그림을 보고 한숨을 쉬셨어요. ‘남들처럼 반듯하게 못 그리냐’고. 그래서... 숨겼어요. 식당에서만 몰래 그리고, 학교에서는 자를 대고 직선만 그었어요. 근데 오빠, 그거 알아요?"

하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이 나를 찔렀다.

"점점 내가 뭘 그리고 싶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칭찬받기 위해 직선을 긋다 보니까, 내 곡선들이 다 펴져버린 것 같아요. 아까 식당에서 설탕 실타래를 보는데... 너무 부러워서, 화가 났어요. 쟤는 부서져도 예쁜데, 나는 부서지면 그냥 폐기물이구나 싶어서."

그녀의 고백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내 명치를 뚫고 들어왔다.
나는 입을 열어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

'아니야, 네 선은 아름다워. 너는 틀리지 않았어.'

하지만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났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역겨웠다.
하림을 향한 연민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 앞에서 '괜찮은 척', '길을 아는 척' 서 있는 나 자신의 위선이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림은 적어도 세상과 부딪혀 깨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다름'을 스케치북에라도 드러냈고, 그 대가로 비난과 멸시라는 형벌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상처는 정직했다.

하지만 나는?

나는 철저한 보호색을 입고 있었다.
낮에는 모범적인 학생으로, 밤에는 몰래 일탈을 즐기는 이중생활. 나는 그것을 '나만의 균형'이라 자위했지만, 사실은 비겁한 회피였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안의 '파란색'을 세상에 내보인 적이 없었다. 부정당할까 봐, '쓰레기' 취급을 받을까 봐 무서워서, 나는 내 본질을 내장 깊숙한 곳에 숨기고 안전한 흰색 유니폼 뒤에 숨어 있었다.

하림은 망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투명한 유리였고, 나는 불투명한 콘크리트였을 뿐이다.
나야말로 이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주제에, 누구에게 등대 노릇을 하려 했단 말인가.

"하림아."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 그녀를 불렀다. 이번에는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백이었다.

"사실은... 나도 몰라."

하림의 눈이 커졌다.

"나도 내가 맞는지 모르겠어. 너한테 '식당은 윕 홀이야', '벽을 세워야 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도 매일 무너지고 있어. 너는 그림이라도 그리지,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조차 몰라서 남의 말을 베껴 쓰고 있어."

나는 주머니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도서관에서 밤새 끄적였던,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나의 파편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노트를 하림에게 내밀었다.

"이게 나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너보다 더 엉망진창이야. 나는 네가 부러워. 적어도 너는 네가 긋고 싶은 선이 있었잖아. 나는... 점 하나도 제대로 못 찍어서 떨고 있어."

하림은 내 노트를 받아 들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녀가 내 글씨들을 읽어 내려갔다. '나는 왜 파란색이 좋을까', '숨이 막힌다', '도망치고 싶다'….
그것은 정답 노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려달라는 비명에 가까운 낙서였다.
한참을 읽던 하림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이 툭, 하고 노트 위로 떨어졌다.
나의 비명이 그녀의 눈물에 젖어 번져나갔다.

"오빠도... 무서웠군요."

"응. 죽을 만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둘 다 이 도시에서는 불량품일지도 몰라."

인정하고 나니 차라리 편안했다.
우리는 실패했다. 우리는 도시의 기준에 부합하는 부품이 되는 데 처절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그 실패의 자리에서, 이상하게도 우리는 처음으로 연결되었다.
완벽한 기계들은 서로 맞물려 돌아갈 뿐 공명하지 않는다. 오직 금이 가고 깨진 틈으로만 바람이 통하고, 소리가 울리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같이 헤매자."

나는 젖은 눈으로 웃어 보였다.

"정답 같은 거 찾지 말고. 기능 같은 거 증명하지 말고. 그냥 너는 네 맘대로 선을 긋고, 나는 내 맘대로 낙서를 하면서. 서로가 망가지는 걸 지켜봐 주자. 네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면 내가 꺼내줄게. 내가 안개 속에 질식하면 네가 흔들어 깨워줘."

하림이 울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예요... 하나도 안 멋있어."

"그렇지? 멋있는 건 저 잘난 빌딩들이 다 하라고 해. 우리는 그냥... 여기서 일단 버티자."

하림은 내 노트를 품에 안았다. 마치 그것이 대단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개는 여전히 짙었고, 우리는 여전히 갈 곳을 몰랐다.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일이면 다시 학교에 가야 하고, 비난을 견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쓸모없음'을 확인한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었다.

"갈게요, 오빠."

기숙사 입구에서 하림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조금 빠져 있었다.

"내일... 식당에서 봐요. 저, 그릴 게 생겼거든요."

"뭘 그릴 건데?"

"오빠의 찌질한 노트요."

하림이 킬킬거리고는 안개 속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흐려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안개 속에서 나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더 이상 질식의 소리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호흡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빈 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은 나도, 나만의 찌질한 선을 그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 23화무용하지만 아름다운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