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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와 선긋기

청소의 기본값은 설거지, 빨래, 바닥 쓸기

by 사이

청소. 녹색창 어학사전 검색을 해보니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이라고 한다. 이 단어 하나에 내포한 ‘더럽다’, ‘어지럽다’, ‘깨끗하다’ 상태값은 참으로 모호하고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그 기본값을 매기기가 나로서는 어렵다. 단어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어 집안일을 하다 보면 새롭게 가지 쳐서 나오는, 마치 고구마줄기처럼 주렁주렁 딸려 나오는 일들을 어디까지 끊어내야 할지 좀처럼 알지 못해 넉 다운되기 일쑤다. 예를 들어 바닥 걸레질을 하다 창틀을 닦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눈앞에 있는 유리창 얼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닦기 일쑤다.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내 몸과 마음이 ‘청소’에 몰입하게 되고 더 깊게 파고들게 된다. 물론 깨끗한 물리적인 환경도 중요하지만 내 시간을 무한정 안배하기엔 끝도 없는 일이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집안일


유한한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위해 청소의 기본값을 정하기로 했다. 설거지, 빨래, 바닥청소. 3가지로 정했다. 4 식구 설거지는 그때그때 나오는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을 닦으면 된다지만 말이 쉽지 가짓수에 따라 4배 수로 증가하고 주말 삼시 세끼를 집에서 먹는 날엔 거기에 3배다. 게다가 물이나 음료수 컵으로 설거지는 배가 된다. 반찬 한 가지라도 하게 되는 날엔 뒷설거지까지 겹쳐 설거지가 산더미다. 숨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빨래 역시 각자 쓰는 수건들을 합치고 밖에서 뛰어놀고 들어온 아이들의 옷가지를 하나 둘 모으면 2일에 한 번씩은 세탁기를 돌려줘야 한다. 양말 역시 사람 수대로 날짜 수대로 배수로 늘어난다. 양말이 특히나 골치인데 세탁기에서 여러 짝으로 나뒹구는 대다 그걸 한대 모아 하나하나 펴서 건조대에 너는 일은 맨 정신으로 못하다. 경제뉴스를 듣는 다든지 영어 쉐도잉을 하든지 뭔가 다른 일을 하면서 해야 덜 스트레스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바닥 닦기. 무선 청소기가 있기는 하나 내 몸이 붙들고 이리저리 끌고 다녀야 한다. 최고의 난이도는 침대 밑이다. 통풍을 위해 다리만 있는 침대 받침대를 샀는데 안타깝게도 통풍과 함께 먼지가 그곳에 소복이 쌓이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닿지도 않는 침대 끝을 향해 손을 뻗어 열심히도 밀어 본다. 에고 끊어지는 내 허리.


청소의 기본값 3 : 설거지, 빨래, 바닥 쓸기


집안청소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회사를 다니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하는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내 꿈, 내 커리어를 위해 일하는 이곳, 집안에서 소소하다고 하는 청소들이 체크리스트처럼 줄지어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현금흐름도 없는 일에 월세 작업실을 얻는다는 건 언감생심. 기준에 따라 해야 할 일과 안 해도 될 일을 명확하게 하고 주기를 만들어 오늘은 여기까지 끊기, 즉 선명한 선을 그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안 그러면 집안 청소라는 모호한 경계의 늪에서 나는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 설거지, 빨래, 바닥청소 딱 3개를 기본값으로 정한다. 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이건 미루는 일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들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이고 최대한 내 몸을 아껴 내일을 도모하리라.



자동화되는 디폴트값 : 식기세척기, 세탁기와 건조기, 무인청소기


하루 청소 3가지 기본값도 이왕이면 자동화했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빨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콤비를 이루고, 바닥 닦이는 무선청소기에서 한 단계 진화된 무인청소기로 갈아탔다. 물론 이런 기기들을 사용한다고 완전히 청소에서 해방되는 건 아니다. 애벌 설거지를 해줘야 하고(안 해주면 굳은 밥풀이 묻어있을 때도 있다) 빨래 역시 건조기에 돌려야 할 것과 아닌 것을 구분 짓고 마르면 그것을 개켜 제자리에 놓아야 하는 잔업은 남아있다. 무인청소기 역시 무인인지라 흡입되면 안 되는 것들을 사전에 정리해줘야 한다. 청소기를 돌리면서 동시에 이루어질 순 없다. 완전한 오토매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집안일이 현격히 줄어들고 내 스트레스도 준다. 다만 그만큼 감당해야 할 것은 전기요금이다. 3가지 가전제품을 드리고 전기요금은 월당 2만 원 정도 올라간 것 같다. 시간당 2만 원 하는 청소 용역비도 아닌데 월 2만 원 하는 전비요금은 기꺼이 지불한다.



집안 청소는 끝이 없다. 집 안에서 늘 일하는 사람으로서 늘어져있는 일들을 눈감을 수도 없고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에게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본업이 존재한다. 물론 현재 진행형이며 대단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매월 급여도 나오지 않는 형체 없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꿈을 좇으며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집안일로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면 내 존재가 사라지는 기분이다. 나는 빨래를 하려고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데, 나는 설거지를 하려고 오랜 시간 공부를 한 건 아닌데, 내 무릎은 걸레질하려고 있는 것이 아닌데 집안일을 하다 보면 자꾸만 나 자신이 작아진다. 청소에 대한 적당한 선 긋기와 타협이 나를 해방시켜 주고 그 시간에 나는 한번 더 읽고 한번 더 쓰고 그리고 한번 더 사색하고 싶다. 지금 나는 내 꿈을 위한 잔근육들을 키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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