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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 베란다 청소

주말 오후 시원한 혼맥 청소!

by 사이

내 몸을 움직여하는 일에 크게 재능은 없지만 밥은 먹고살아야 하기에 밥 하듯이 집안일을 할 수밖에 없다. 하루 동안 먹어야 할 하루 야채처럼, 하루에 해야 할 하루 청소를 설거지 빨래, 바닥 닦이로 정하고 그걸 문명의 이기에 일부 외주를 줬다. 한결 수월해진 집안 청소. 그러나 정규 시리즈 외에 번외 편이 존재하듯 나에게도 청소 번외 편, 특별판이 존재한다.



방학 숙제 마냥 하기 싫은 베란다 청소


참 하기 싫은 일이다. 물론 하지 않아도 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다만 나만 알뿐. 이름하여 베란다 청소다. 베란다에는 휴지, 키친타월, 세제 등 생활 소모품이 대용량으로 보관되어 있고 1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한 캠핑의자, 스노클링 장비들, 운동 소도구들이 자리한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건 그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을 비웠고 그 공간에서 나는 휴식을 취하며 빨래 널 듯 햇살아래 나를 널어놓고 나를 충전한다. 창고와 휴식이 공존하는 이 공간을 깨끗이 청소하는 건 매번 하는 일은 아니지만 어쩌다 하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힘들다는 것이 몸이 힘든 것도 있지만 뭔가 방학 내내 놀다 하루 전날 숙제를 몰아서 하는 불편한 마음이 힘들다. 날 잡고 해야 할 일인 게 분명한데 그날을 잡는다는 게 쉽지가 않다. 1년에 손꼽을 정도니깐. 이럴 땐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내가 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갈팡질팡 하지 못하도록 훅 치고 들어가야 한다. 내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음주 청소다.



청소에 앞서 선맥주 후고기


때는 남편은 출장을 가고, 아이들은 친구들과 정신없이 노는 주말 오후시간이 적기다. 난 혼자 삼겹살을 굽는다. 지글지글 고기가 식기 전에 따뜻한 기운을 머금고 있을 때 먹기 위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하는 건 냉동실에 유리잔을 넣는 일. 시원하게 들이켜고 싶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고추냉이와 핑크소금, 친정엄마가 주신 겉절이 그리고 따끈한 밥 한 숟가락. 이거면 끝이다. 다만 주의할 건 삼겹살의 양이다. 감질나게 딱 1인분(200g)만 하면 안 된다. 배가 두둑해질 양 1.5(300g) 인분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포만감에 기분이 좋아지고 그 기분으로 베란다 청소를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다. 지글지글 삼겹살이 거의 익어 갈 때쯤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차가워진 글라스잔을 꺼내서 아껴 두었던 맥주를 살짝 기울여 영롱한 빛깔의 노란 물을 따라준다. 늦은 아침 이후로 아무것도 넣어주지 않은 빈 속에 꼴짝꼴짝 시원하게 맥주 반 컵을 한 번에 넣어준다. 고기 먹고 맥주가 아니라, 선맥주 후고기 다. 찐하게 올라오는 그 맛! 삼겹살 안주와 함께 먹으니 순식간에 끓어오른다. 이 취기와 포만감으로 이제 움직일 때다.



접영 하듯 물걸리질,
사고력이 필요한 정리는 절대금지!


우선 사용을 다한 여러 개의 걸레에 흥건히 물을 묻혀준다. 그리고 검은 봉지와 함께 일터로 나간다. 점점 올라오는 취기는 내 팔 동작을 유연하게 만들어준다. 오른손에 젖은 걸레를 잡고 접영 하듯 휘저어준다. 접영(모든 영법에서 그러하지만)에서 손 돌리기를 할 땐 저항을 최소화해야 한다. 맥주를 한잔하니 저항이 최소화된 것 같다. 팔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접영, 버터플라이처럼 가볍고 빠른 손놀림이 나비 같다. 쓱싹쓱싹 몇 번 문지르면 새까맣다. 맨 정신이면 더러워서 찡긋 할 것도 같지만 맨 정신이 아니기에 이것 역시 아무렇지 않다. 그냥 한다. 오토매틱이다. 이 새까매진 걸레를 다시 사용하려고 바보같이 빠는 일은 없다. 미련 없이 버린다. 조각난 무용의 걸레가 베란다 물청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유용하다. 조각난 걸레 여러 개를 가지고 베란다 바닥에 앉아 버터플라이 몇 번을 하면 끝. 취기가 다 올라오기도 전에 일이 끝이 버린다. 내친김에 신발로 어지럽혀진 현관도 닦아 본다. 그냥 볼 때 괜찮았는데 물걸레질을 한번 하면 아연질색. 다행히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이 정도는 참을 만하다. 이때 신발장을 열어 신발을 정리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정리’라 함은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 지어 버릴 것은 버리고, 남은 것들은 용도에 맞게 가지런히 제자리에 놓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사고력이 필요하다. 계절감과 빠르게 커가는 아이들의 신발 사이즈까지 가름하면서 정리하는 건 술 먹고 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 신발장 문은 절대 열지 말아야 한다. 괜히 열었다 술기운에 온갖 신발을 다 꺼내서 휘청거리며 되지도 않는, 술 깨면 다시 할 바보 같은 헛 짓을 하면 안 된다. 단지 아무 생각 없이 쓱쓱 닦는 물걸레질만 해야 한다. 음주 청소는 딱 거기까지다. 욕심부리면 뒷감당하기 어렵다.



하기 싫다기 보단 늘 하는 일이 아니기에 미루고 미루는 집안 청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술기운일지라도.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널따란 베란다 청소는 끝이 나고 몸놀림이 운동이 되었는지 술도 적당히 깬다. 용기가 없었을 뿐 하면 금방 끝날 일이었다. 근데 왜 그동안 안 했을까 하는 자기반성 보단 이렇게 하는 것도 방법이네 하고 위안을 삼는다. 좋잖아! 주말 오후 시원한 혼맥. 이거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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