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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 하는 마음

자식을 향하는 마음, 부모를 향하는 마음

by 사이

입 짧은 아이가 잡채가 먹고 싶단다. 반가운 마음에 재료들을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아본다. 앱으로 하는 쇼핑은 눈으로 식자재를 직접 보질 못하니 그 양을 가름하기 어렵다. 오늘도 나는 시금치를 한아름 샀다. 온 식구 1주일은 먹어도 될 양이다. 겨울 바람 맞고 자란 섬초라 달고 맛있어 무쳐 놓으니 입안에서 딸기 마냥 향긋하다. 잡채에 넣을 시금치가 이리도 맛있으니 기분도 덩달아 들뜬다. 양파도 채 썰어 달큰하게 볶고, 당근도 유기농으로 사서 채 썰어 볶아 놓았다. 버섯도 식감이 좋은 목이버섯과 말캉거리는 느타리버섯 2종을 양껏 볶아 놓았다. 당면과 함께 야채도 듬뿍 먹이려는 마음으로 욕심을 냈다. 잡채고기는 달달하게 불고기 양념으로 재어 놓았다. 이제 아침에 일어나 새벽배송으로 오는 당면을 삶고 고기만 볶아 간밤에 준비한 야채들과 함께 버무리면 된다. 저녁 먹고 시작한 잡채 재료 준비는 손이 느려 그런지 아니면 양이 많아서 그런지 10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에고, 힘들다. 아들 입에 잡채 넣어주려니 힘들다.



아들 먹일 잡채 하는 날 친정 엄마의 안부 전화


친정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설 연휴 전날 남편 생일을 미리 챙기시겠단다. 농장 일로 바쁘실 텐데 사위 생일은 빼먹지 않고 챙기신다. 매년 식사를 함께 하거나 일정 때문에 챙기지 못하면 꼭 전화라도 하셔서 ‘생일, 축하하네’란 말을 잊지 않으신다. 올해도 어김없이 잊지 않고 챙기신다. 가만히 달력을 들여다 보니 설연휴 빨간 날이 연이어 있다. 빨간 날이지만 돼지 농장일은 휴일이 따로 없다. 돼지들이 빨간 날이라고 쉬지 않는다. 엄마 역시 휴일이 아니다. 돼지들에게 밥을 줘야 하고 돈사를 청소해 주어야 한다. 올해 칠순인 엄마는 아직도 그 힘든 일을 하고 계신다. 그리고 명절 음식도 손수 챙기신다. 농장 일을 하며 손수 잡채, 전, 갈비, 양념게장을 하시고 물김치도 새로 담고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도 뽑으신다. 요즘에는 힘에 부치시는지 직접 빚으셨던 만두는 남의 손을 빌린다.



설 명절 '잡채'하는 품 하나 덜으셨을까?!


연이어 붙어있는 빨간 날을 보니 엄마의 하루가 그려진다. 아침밥 먹고 농장일 보시고 친척들 오시면 손수 하신 음식을 내오실 엄마. 나는 고작 자식 입에 들어갈 잡채 하나 하는데도 힘들어 낑낑거리는데 엄마는 참 힘드시겠구나 싶다. 옷을 챙겨 입고 집 앞 슈퍼에서 당면과 재료를 더 사왔다. 이왕 하는 거 많이 해서 엄마에게 드리면 잡채 하는 품 하나는 덜으시겠지. 남편 생일 기념 식사할 때 전해드리면 좋겠다. 싶어 양을 두 배로 늘렸다. 다시 다듬고 데치고 무치고, 볶고 지지고. 간밤에 이어 이른 아침부터 부엌에서 사부작거린다. 이렇게 하면 엄마가 좀 편하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일상인 내리사랑, 특별한 치사랑


자식을 향하는 마음은 일상이다. 아침부터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을 때까지 바라보고 응원해주고 위로해 주는 마음은 공기처럼 흐른다. 그 일상이 힘에 부쳐 소원해 지는 순간도 있지만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내리사랑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엄마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를 향하는 내 마음은 특별하다. 그래서 일상에 녹아있지 않다. 일부러 꺼내보고 알아채고 찔러줘야 그 사랑이 빼꼼히 나온다. 부러 달력을 드려다 보고 잡채 하는 순간이 어쩌다 겹쳐져 마음 한구석에 있던 치사랑이 볼록 튀어 올라온다.


잡채 솜씨가 좋은 편인데 엄마에게 첫 선을 보인 잡채는 두 배로 늘어난 당면 양 때문인지, 삶는 물의 양과 시간을 잘 조절하지 못해서 인지 당면이 불어버렸다. 탱글탱글 알맞게 익었을 때 꺼내서 참기름을 두르고 비벼주어야 불지 않은데 이것 역시 한 박자 늦어버렸다. 간발의 시간 차이인데 다 만들고 보니 당면이 퍼져있다. 늘 만들던 잡채인데 특별히 엄마에게 선보이려니 간발의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퍼진 잡채를 엄마에게 드리며 간발의 차이가 잡채만 이기를 바란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지만 어려운, 그래서 특별한 내 치사랑에 간발의 차이가 없길 바란다. 그리고 내리사랑이 일상이듯 치사랑도 일상이 되길 바란다.



#일상 #육아 #효도 #부모와_자식_사랑 #치사랑_내리사랑

#특별한_치사랑에_간발의_차이가_없기를_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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