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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아플 자유

맑게 갠 어느 봄날 맘껏 아파 행복했던 하루

by 사이

마음껏 아프기. 삼시세끼 밥 먹고 약 먹고 노곤하면 그대로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몸은 아파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쉴 수 있어 편안하다. 회사 졸업 후 오랜만에 찾아온 감기 몸살. 회사 다닐 때는 자주 아파 병원 가는 일도 잦았다. 한창 아플 땐 감기는 기본이고 몸 곳곳에 염증이 많았다. 눈이 벌게 가면 결막염이고 입에서 피가 나서 가면 잇몸이 헐어있고 염증이 있었다. 질염은 달거리 하듯 늘 함께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이젠 그다지 아픈 곳도 딱히 없다. 진정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였다. 편해진 마음이 면역력도 증진시킨다.



입원실에서 동고동락한 아들과 감기몸살


아들이 폐렴으로 입원하고 며칠 동고동락을 하며 시간차를 두고 나란히 몸져누웠다. 아픈 아들은 안타깝지만 병원 밥이 엄마밥보다 5배는 맛있다는 아들 녀석의 먹성과 지낼 만했던 병실 덕분에 간병이라기 보단 오랜만에 아들과 단둘이 오붓하게 지낼만했다. 아기와 청소년 사이 어디쯤에 있는 아들 녀석을 품에 안고 잘 일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까 싶어 두 팔로 꼭 안고 잠들었다. 남달랐던 스킨십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남편이 긴 출장 끝에 나와 교대하는 순간 안도감이 들어서였을까. 아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집에 돌아온 첫날밤 인후통을 시작으로 온몸이 욱신거린다. 오랜만에 찾아온 몸살. 낯설지만 불청객은 아니다. 편안하게 아파도 된다.



회사를 졸업하니 감기몸살도 반갑다


이젠 아무 때나 병원을 찾아가도 된다. 회사 점심시간에 맞춰 밥도 못 먹고 가지 않아도 되고 야간진료를 찾아 까막눈으로 먼 길을 아슬아슬하게 운전해 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가고 싶은 시간에 가까운 동네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새롭게 생긴 병원에 가니 다양한 수액들을 광고하고 있다. 비타민 수액부터 독감수액까지 편의점에서 음료수 고르듯 고를 수 있다. 당연히 증상에 따라 의사 처방이 있어야 하지만 시간이 없어 못 맞지는 않는다. 회사를 다닐 때 시간에 쫓겨 맞고 싶어도 못 맞던 몸살수액을 내 손에 꽂아 주었다. 새 건물, 새 병원, 새 침대 그리고 단정하게 정리된 시트 위에 욱신거리는 몸을 눕히고 낮잠을 청한다. 링거 덕분이었을까 좀 걸을만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갓 구워 낸 빵과 커피를 샀다. 병원 길에 잠시 딴 길로 새도 되는 여유로운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아픔을 온전히 누리는 것도 기쁨이요 복이다


이튿날 딸아이 아침밥을 챙겨주고 아침 햇살을 드리려 블라인드를 하나씩 조심스레 올린다. 창 밖은 봄꽃들로 한창이다. 간밤 비 소식으로 파란 하늘에 낮게 깔린 뭉개 구름이 예술이다. 창을 여니 새소리가 명랑하게 들린다. 이런 화창한 날 아픔을 온전히 누울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식후 30분 복약지도에 맞춰 착실하게 약을 먹고 읽고 싶었던 책을 손에 쥔 채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투약봉투에 졸음주의가 공식적으로 낮잠을 허락한다. 책을 펼쳐 몇 장을 읽다 말고 살랑거리는 하얀 커튼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잠든다. 아침에 먹은 약 기운 덕분에 잠깐 자고 일어났는데 아침잠 보다 더 개운하고 몸도 가뿐하다. 이렇게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혼자 고요히 있는 한낮이라니! 이 순간이 행복하다..



일과 육아를 양립했던 회사시절, 링거 투혼이라 할 만큼 대단한 중병은 없었지만 잔병치레로 늘 사무실 서랍에는 비타민처럼 복용하는 상비약들이 있었다. 제때 병원에 가지 못하니 진통소염제를 먹고 버티곤 했는데 이젠 참지 않아도 된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원하는 치료를 제때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온전히 몸져누울 수 있어 더없이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이젠 몸도 마음도 별로 아프지 않다. 감기약은 고사하고 공황장애약과 수면제도 먹지 않는 지극히 건강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오랜만에 앓고 나니 새삼 잊고 지냈던 골골거리던 기억들이, 힘든 몸을 이끌어야 했던 서러웠던 감정들이 일렁이다 이내 깨끗이 씻겨 내려간다. 며칠째 쌓인 송홧가루가 봄비에 말끔히 씻겨 내려가듯 알아차리지 못했던 해묵은 감정들이 정화된다. 맑게 갠 봄날 맘껏 아파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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