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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Jul 22. 2024

피아노 - 소싯적 취미

그때 그 시절 '여명의 눈동자'

“선생님, '여명의 눈동자' 테마곡을 치고 싶어요.”, “하하하! 어머니, 연식이 느껴지네요.” 피아노 원장님은 정말 크게 웃으셨다. “네 맞아요, 옛날 옛적 그 드라마, 남녀 주인공이 철책에 매달려 애달게 키스를 하던 장면으로 유명한 그 드라마요.” 드라마 속 주인공 최시라, 최재성의 안타까운 러브스토리 테마곡을 엄마가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래서 그랬는지 피아노를 한창 치던 초등학생 시절 악보를 보지 않고도 치곤 했다. 제법 잘 쳤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피아노를 그만두었다. 피아노 전공이 아닌 이상 ‘취미 활동’인 피아노는 잠시 미루어도 되는, 그저 그런 여가 활동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땐 그랬다.


긴 세월 잊고 지냈지만 다시금 깨어났다. 어린 시절의 피아노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정해진 인생 사이클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학업, 취업, 결혼, 육아를 거치며 어느덧 인생 중반길에 들어섰다. 누구나 그러하듯 그 길은 희로애락의 반복이었고, 정확히 딱 4등분이었으면 좋으련만 대부분 노여울 ‘노’와 슬플 '애'였고 당시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 피아노를 다시 만났다. 초등학생인 아이들 피아노 학원에서 연주회를 했는데 아이들의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어설피 연주하는 명곡들이 깊게 간직해 놓았던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깨웠다. 차례를 기다리며 커튼 뒤에서 손톱을 뜯고 있던 어린 소녀. 쑥스러워 바른 자세로 인사하지 못하고 얼굴을 옆으로 비스듬히 갸우뚱 인사하던 나. 연주하다 곡을 까먹어 처음부터 다시 쳤던 기억. 능수능란하게 연주했던 기억보다 수줍고 어설펐던 나의 어린 시절 ‘피아노’가 새록새록 돋아났다. 사랑스럽던 그 시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지만 사랑스러운 마음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다시 배우고 싶다, 피아노. 언젠가 다시 배우리라.


다시 치게 된 피아노, 어디로 갈지 길을 잃은 내 손가락


생각보다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그로부터 1년. 인생 이모작을 일찍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9to6를 하지 않으니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활동 시간이 2배로 늘어났고 내 인생도 2배로 늘어났다. 아이들이 다니는 집 앞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가 보다. 대부분 초등학생들이 피아노를 배우러 왔고 그중 성인은 나 말고 없다. 간혹 있긴 한데 흔치 않은 모양이다. 초등학생들이 아직 하교하지 않은 12시. 그때 레슨이 시작된다. 레슨은 1시간인데 내가 피아노 치는 시간은 앞뒤로 1시간씩 3시간이다. 다시 피아노를 치니 악보가 잘 읽히지 않는다. 부끄러워 학원에서 연습하지 않고 학원 가기 전 1시간 다녀와서 1시간을 연습했다. 주 2회인 게 다행이다. 학원 안 가는 날 연습이 필요했다. 특히 왼손이 갈팡질팡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3개월동안 배운 10곡의 피아노 메들리


어설프지만 그리웠던 맛이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건반을 누를 때마다 울리는 이 맛. 건반이 가벼운 전자 피아노에서 느낄 수 없는 묵직하고도 깊은 맛이 좋다. 아날로그 피아노는 입안 가득 국물을 들이켜면 온몸이 뜨끈해지고 영혼까지 따뜻해지는 걸쭉한 설렁탕 마냥 내 입맛에 딱 맞는 진국이다. 오랫동안 안 했지만 하던 가락이 있어서 인지 4번의 레슨으로 바이엘을 끝내고 연주곡으로 넘어갔다. 첫 곡은 이루마의 ‘kiss the rain’. 다라라 라랄라~~ 아! 첫음절부터 딱 내 곡이다. 비 오는 날 따뜻한 커피가 생각 나는 곡! 음의 강약과 부드러운 선율이 무척이나 감미롭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선생님의 능숙한 연주에서나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나의 'kiss the rain'은 "응? 그 곡 맞아?!" 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고 그로부터 2개월이나 흘러 매끄러워졌다. 어려웠던 'kiss the rain'를 넘어 오드리 햅번의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영화 OST 'Moon River', 뮤지컬 캣츠의 대표곡 'Memory',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Yesterday', <노팅힐> 영화 OST 'She', 김동률의 '거위의 꿈', 히사이시 조의 대표곡인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삽입곡 등 피아노 원장님의 탁월한 선곡과 각별한 지도 아래 소짓적 피아노 실력을 되돌리기 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10곡을 치고 시즌1 ‘피아노’가 끝났다. 물론 ‘여명의 눈동자’도 그때 그 시절의 느낌을 한껏 살려 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악보를 보면서 말이다.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에 시작해 한여름을 피아노와 보내고 나니 내년 여름도 기대가 된다. 또다시 나만의 메들리 10선, 시즌2를 만들고 싶다. 그중 몇 곡은 딸아이와 다정하게 협주하는 모습을 꿈꾸고 있다. 피아노 전공이나 한 줄 이력으로 쓸 피아노 대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를 위해,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배웠던 피아노, 그 시간이 애틋하다. 좋아하는 마음은 결국 좋아하는 것으로 흐른다. 피아노 연주가 좋아 피아노를 다시 치게 되었다. 한여름밤이 아닌 한낮의 꿈,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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