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네거리에 걸린 커다란 글판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 따뜻한 봄날 내게로 왔다 흘러 흘러 희미하게 지나간다. 햇살이 눈부시던 어느 날 온 우주 같았던 내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희미해져 간다.
우린 인연일까
사람이 좋고 나쁨이 어디 있는가, 서로의 기질과 성향이 잘 맞냐 안 맞냐 에 따라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고 잘 맞았더라도 상황에 따라 틀어지는 게 인간관계인데 내가 애써 노력한다 한들 안 보고 지내는 세월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늘 관계가 수평이면 좋으련만 때론 관계가 기운다. 그땐 여유로운 쪽이 한번 더 연락하고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물으면 그 관계는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 같다. 좋은 인연에 젊은 시절 연애하듯 감정 소모하는 줄다리기란 없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반백살을 향해 가며 적을 둔 회사가 두 곳밖에 되지 않는데 한 곳에서 1년이 채 되지 않으니 다른 한 곳에서 지내온 세월이 길었다. 그만큼 좋은 인연이 많았는데 그곳을 나서니 채반에 걸러지듯 인연도 걸러진다.
그땐 좋았지만 아쉬운 인연들
입사 3년 차인 내 옆에서 신입사원으로 첫인사를 하던 후배. 그 친구나 나나 길었던 회사 생활만큼이나 부서이동도 잦았지만 늘 함께 같은 부서로 발령 났다. 그 친구의 입사와 연애, 결혼, 육아까지 옆에서 지켜봤다. 되돌아보니 이런 인연도 없는데 회사를 떠나니 그 인연도 사라졌다. 연락 한번 할 법한데 나나 그 친구나 사는데 바빠서 인지 아니면 선후배 관계였던 우리가 내 육아 휴직 후 직급으로 위아래가 뒤바뀌어서 그런지 아니면 함께 일한 긴 시간 동안 밥은 먹었어도 술 한잔 기울이지 않아서 인지 회사를 나온 이후 서로 연락이 없다. 당연한 건데 내가 새삼스러운 걸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인연은 지친 육아로 끊어져 버린 인연이다. 아이 낳기 전에는 종종 둘이 마주 앉아 회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여서 할 이야기가 많았다. 쌍둥이 낳고 돌 때쯤이었던 것 같다. 아이 낳고 애 보느라 “언니, 잠깐만!”, “언니~ 오래 통화를 못할 것 같다. 미안해.” “언니, 다음에 통화하자”가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레 연락이 안 오고 내가 연락할 여유가 생겼을 땐 이미 언니는 나와의 관계를 고이 접었다. 내가 그녀에게서 사라졌다. 애 낳고 육아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인연을 홀대하면 안 되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인연을 놓았고 상대방도 소중함을 느끼는 못하는 관계를 정리했다. 지금도 가끔 친했던 그 언니를 꿈에서 본다. 아쉽다. 지혜로웠다면 그 인연을 좀 더 소중히 했을 텐데 처음 하는 육아 마냥 그 인연도 서툴렀다.
행여 지나가는 길이라도 만나지 말았으면 하는 인연들
오며 가며 만나면 반가워 다시 붙잡고 싶은 인연도 있지만 지나가다 혹시라도 마주칠까 몸서리치는 인연도 있다. 나에 대한 상대의 기억이 어땠는지 몰라도 나에게 상대는 그리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는다. 상대가 나빴다기 보단 혹은 내가 어리석었다기 보단 서로가 인연이 아니었으니 앞으로도 만나지 말았으면 하는 사이다. 저 멀리 비슷한 사람이 서있으면 길을 뺑 돌아간 적도 있다. 때론 다시 만나면 그때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웃으며 안부를 물어볼 수는 있지만 결코 잘 되길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다. 회사를 나오고도 한동안 앙금으로 갈아 앉아있다 누군가 소식을 전하면 그 앙금이 일렁이곤 한다. 회사가 아니었으면 마주하지 않았을 인연을 회사를 떠나고서도 붙들고 있는 내 마음이 가난하다. 세월이 흐르면 그 앙금도 씻겨 내려갈까?! 학창 시절 좋았는지 나빴는지도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떤 친구들처럼 말이다. 그러길 바란다.
만나는 게 뜸하지만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인연들
채반 위에 걸러진 인연들은 회사를 나오고도 지금껏 만나고 있다. 내가 제일 먼저 회사를 나왔지만 몇 년 사이 대부분 회사를 나왔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같은 회사를 나왔지만 회사 밖 생활은 모두 제각각이다. 가끔 만나 그들이 들려주는 그들만의 세상 이야기가 재미있다. 회사에서 듣지 못했던 개인 속사정을 살포시 펼쳐 내보이는 친구도 있고 열정적으로 운동에 몰입하고 있는 친구도 있다. 개인 사업을 시작한 친구도 있고 회사를 나왔다 다시 다른 회사에 발을 담근 친구도 있다. 회사에서 만났던 인연들이라 모이면 옛 애인처럼 구(舊) 남친, 옛 회사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이내 각자 바쁜 요즘 일상들을 쏟아낸다. 듣고 있으면 내 이야기다. 서로 얽히고설킨 이야기는 회사 안이건 밖이건 비슷하다. 세상사 다 거기서 거기다. 같은 회사에 몸담고 있다 모두 그곳을 떠나 제각각 사느라 얼굴 볼 날이 많지는 않지만 어쩌다 만나면 반갑다. 기쁜 일, 슬픈 일 함께 나누고 위로하고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