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책만 볼수 있다면 좋겠다
16년의 책방생활. 긴 시간 동안 회사 안에서 역할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늘 책과 함께였다. 책 제목만 가지고 ISBN(책바코드) 찾기, 대학별 온라인 교내서점 운영, 오프라인 매장 책 진열, 카운터 계산, CS 교육 및 평가, 매장 오픈 및 폐점 마케팅, 철마다 바뀌는 오프라인 매장 프로모션 등 다양한 업무를 했다. 한 가지 직무를 전문적으로 키워나가는 요즘 시대에 맞지 않게 나는 한 분야의 전문가라기 보단 한 회사에 몸 담고 여러 직무를 경험한 제너럴리스트였다. 애초 시작은 CS기획이었으나 회사가 좋아, 책이 좋아 책방에 오래도록 눌러앉았나 보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늘 책과 함께
대체적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했고 나 역시 책을 무척 좋아한다.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풀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불확실한 인생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울 때도 늘 책이었다. 회사 일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크건 작건 고민거리가 생기면 책 속에서 길을 찾곤 했다. ‘모든 사람이 보다 나은 삶은 살도록 도와주는 것’ 회사 사명답게 그곳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책과 함께 한다.
종로 1가 1번지 야간작업하며 보는 책맛
회사를 다니며 가장 좋았던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불 꺼진 밤, 정적이 흐르는 책방에서의 야간작업이다. 특히나 종로 1가 1번에 위치해 있는 광화문 지점이 으뜸이다. 가장 넓기도 하고 그만큼 진열되어 있는 책들도 방대하다. 지하 벙커처럼 시내 중심 한가운데 밤새도록 몸을 둘 수 있다는 것이 기분 좋기도 했다. 주로 대형 설치물 작업이 있을 때 야간작업을 하곤 하는데 외주업체가 들어와서 작업을 진행하고 본사 직원은 작업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매장과 협업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 간혹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는 매장 바닥에 앉아 잔업을 한다. 초 단위를 다투어 진행되는 업무가 일단락된, 마무리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틈틈이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들쳐볼 수 있다. 작업 물품들을 나르며 카테고리 별로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쭉 훑어 본다. 특히나 연말연시면 한해 트렌드와 다음 해 키워드가 메인 복도에 눈에 띄게 진열되어 있어 긴 복도를 따라 올해는 이렇게 왔다 저렇게 가는구나 생각할 때도 있다. 어떤 해는 돈으로 시작해 미라클모닝으로 이어져 다들 먹고 사는게 바쁘구나 생각했던 적도 있다. 인기 있는 책들이 중앙을 차지하고 거대한 POP를 앞세워 위용 있게 서있다면 각 분야별로 서가에 책등만 보인채 꽂혀 있는 책들이 있다. 책등만으로 어떤 내용일지 상상해 가며 하나씩 하나씩 밤새도록 모든 책들을 다 들춰보고 싶다. 표지가 이렇게 생겼구나. 종이 질감과 그 안에 놓인 활자모양을 매만지고 싶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구나!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었구나! 하나하나 쓰다듬어 주고 싶다. 세상에는 좋은 책들이 참 많다. 단지 내가 모를 뿐. 이 좋은 책을 단돈 2만 원 내외로 사서 볼 수 있다니 이것 역시 행복한 일이다. 누군가는 한번 보고 나면 쓰레기가 된다지만 한번 읽고 인생에 전환점을 맞을지 누가 알겠는가. 기꺼이 지불하리라. 일만 아니면 철퍼덕 한쪽 구석에 앉아 밤새도록 책만 읽고 싶다.
밤새 책만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심야책방
나처럼 긴긴밤 정적이 흐르는 서점에서 책 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심야책방을 진행한 적이 있다. 콘셉트는 북캠핑. 서가 사이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책과 함께 보내는 행사다. 초저녁부터 시작해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작가와의 만남도 함께 진행됐다. 자정을 넘겨 1박 2일로 진행되는 행사는 처음이라 예기치 못한 일들도 생겨났다. 영업종료 후 불꺼진 다른 입점업체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고객 동선과 사전 안내를 어떻게 할지, 중앙에서 통제되는 냉난방을 한밤 중 어떻게 관리할지, 자정을 넘겨 찍히는 익일 매출데이타를 어떻게 전산처리할지 등 사전에 협의해야하고 의견을 조율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기존에 해보지 않은 일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긴장도 됐지만 재미난 에피소드로 남는다. 지금은 달콤한 사탕마냥 호주머니에 넣고 간간히 꺼내 먹으며 미소 짓게 하는 일화 중 하나랄까?! 즐거웠던 추억 한 조각이다. 그날 심야책방은 나에게 여러 장의 장면으로 기억된다. 글밥이 많지 않은, 그림으로 모든 걸 말해주는 동화책 같다. 늦은 밤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씩 잦아든다. 복도 끝부터 시작해 텐트가 하나씩 만들어지고 이내 이벤트 당첨된 참가자들로 하나씩 채워져 나간다. 시끌벅적한 저녁시간을 지나 자정을 넘기며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까. 정적이 흐른다. 책 보는 사람 외엔 아무도 없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떤 이는 텐트 안에서, 어떤 이는 서가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어떤 이는 서서 평대 위에 놓인 책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즐기고 있다. 새벽 3시를 넘기며 잠드는 사람도 있지만 아침까지 책과 함께 긴 밤을 나는 사람도 있었다.
새벽의 서점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책을 읽지 않아도 책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늦은 밤 다시 책방에 있을 수 있을까? 기회가 된다면 다시 그곳에 가고 싶다. 해야 할 일이 있는 곳이 아닌 단지 놓인 책을 맘껏 즐길 수 있는 독자로서 늦은 밤 책방으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