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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Aug 21. 2024

책방 추억 - 책울림길

회사시절 유일한 숨구멍

내가 사는 동네, 책향기 마을. 파주 출판도시에 자리하고 있다. 출판도시답게 책향기가 나는 마을이란다. 회사가 광화문에서 이곳으로 이전하고 나 역시 복직하며 특별한 연고가 없는 이곳에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되었다. 더 이상 출근하지 않는 지금도 나는 이곳에 산다. 번잡스러운 도심이 아니어서 좋고, 몇 걸음 가면 자연과 함께 숨 쉴 수 있는 곳들이 곳곳에 숨어있어 계절을 마주하기 좋은 동네다. 그래서 그런지 책과 자연이 어우러진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책울림길>이다. 


제일 먼저 계절을 맞이하는 길, 책울림길


출판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출판단지 안에 자리한 ‘길’ 답게 그 이름도 <책울림길>이란다. 책에 담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울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24시간 누구에게나 개방된 작은 동산을 끼고 굽은 길이 나있다. 그 사이사이 이름 모를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한쪽으로 철새도래지 팻말이 꽂힌 늪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어 천연기념물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간간히 볼 수도 있다. 이 길을 아침에 거닐었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


내게 출근은 전쟁이었다. 늘 아이들과 함께였고 그만큼 숨 가쁜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이들 등원과 함께 하루 1라운드가 끝나면 2라운드의 시작, 회사 출근. 아이들을 보내고 정신을 차려보면 내 몸은 회사 책상 앞에 놓여져 있다. 진이 빠지고 멍하다. 카페인이 필요했다. 내 손으로 타는 커피, 탕비실에 놓인 봉지 가루커피가 아닌 숙련된 솜씨로 커피머신에서 뽑아져 나오는 내돈내산 커피를 마시고 싶다. 따뜻하고 달달한 커피를 오늘도 무사히 출근한 나에게 대접하고 싶다. 늘 가는 카페에 가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딱 5분, 그 찰나에 나는 <책울림길>을 걸었다.


사시사철 언제나 새로운 옷을 입는 곳, 책울림길


이른 봄, 탐스런 꽃망울을 시작으로 이내 팝콘처럼 팡팡 터지는 벚꽃을 볼 수 있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엔 스쳐 지나가는 아카시아향이 있어 빠른 걸음을 멈추게 하고 여름엔 짙은 초록잎 아래 드리워진 그늘 사이를 걷게 된다. 한여름이 지나간 자리, 아침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면 크고 작은 나무들이 앞다투어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일교차가 커서 인지 이곳 단풍은 유난스럽게 색이 곱고 아름답다. 단풍을 책갈피 삼아 책에 꽂는 소녀감성은 없지만 떨어진 잎 한두 개쯤은 주워다가 회사 모니터 앞에 두고 회색 콘크리트 속 무미건조한 사무실 내 책상에 색을 입혀본다. 형형색색으로 찬란했던 화려한 시절을 뒤로하고 추운 겨울이 찾아오면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몽환적인 풍경을 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이른 아침이다. 간혹 폭설이 내리기라도 하면 출근길은 전쟁이지만 이곳 풍경은 온갖 시름과 허물을 새하얗게 뒤덮어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머금는다. 누구도 걷지 않은 그 평화로운 길을 걸으면 시린 마음도 정돈되고 평온해졌다. 


회사사람 시절 유일한 숨구멍, 책울림길


쉼 없이 옷을 갈아있는 그 길을 복직 후 6년 가까이 함께 했다. 나 역시 아이들을 키우며 회사를 다니느라 쉼 없이 달려왔다. 아침마다 커피를 굳이 돈 주고 사 먹는 나를 두고 커피값 아끼면 애들 과자값이라 하고 어떤 이는 ‘커피 마시러 회사 나오냐’고 핀잔을 줬지만 나에게 ‘아침 책울림길 산책’은 숨구멍이었다. 24시간 중 딱 20분 하는 숨구멍. 나는 슈퍼우먼이 아니다. 내 능력 최대치로 일과 육아를 양립하는데 애썼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나만의 속사정이었으리라. 그래서 굳이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나 있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한 모금 담배로 갑갑한 회사생활에 숨구멍을 낸다. 또 어떤 이는 오래도록 화장실에 앉아 변비와 시름한다. 담배 타임과 화장실 타임, 나의 책울림길 타임. 그 시간의 경중을 따져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하나씩 다른 종류의 갑갑함을 안고 산다. 그리고 그것을 푸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일과 육아에서 오는 숨가뿜, 바쁜 일상이 죽을 때까지 끝날것 같지 않은 답답함. 나는 책울림길 위에서 그 생각과 감정을 오프할 수 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3라운드로 치워지는 내 일상의 전쟁을 잠시나마 멈추고 숨을 쉬었다.


지금은 비록 회사를 나가지 않아 열심히 계절을 입고 있을 그곳을 가까이서 느끼지는 못하지만 행복한 여운은 여전히 남아있다. 단풍이 곱게 물들었을 땐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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