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의 자유, 관계의 자유
회사 졸업 이후 가장 즐거운 건 해외여행을 내 맘대로 다닐 수 있다는 점이다. 철마다 돌아오는 행사 일정에 따라 내 여행스케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고 싶은 때 그리고 남들이 가지 않는 평일에 떠날 수 있어 좋다. 성수기 일정이 아니기에 여행 경비 역시 합리적이다. 한번 갈 비용으로 적어도 2번은 다녀올 수 있다. 짧은 휴가에 맞추어 시간에 쫓기듯 일정을 잡을 필요도 없고 여행 중 회사에서 전화 올 일도 없어 들뜬 여행 기분을 헤치지 않는다.
언제든 떠날 자유, 온전히 누릴 자유
회사에서 오는 전화는 정말 반갑지 않다. 숲길을 조용히 거닐고 있는데 울리는 진동음은 내 정신까지 흔들어 놓는다. 국제전화까지 할 일이면 대체적으로 평범한 일은 아니다. 다급한 전화이지만 정말 받고 싶지 않다. 그리고 대망의 카카오톡. 여행 후 "카카오톡 확인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확인 안 하더라" 하고 핀잔을 준 상급자. 휴가 중 이어도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부서 내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야 된다는 게 이유다. 어차피 다녀와서 일을 해야 하니 그렇단다. 물론 상급자에 따라, 부서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지만 온전히 내 시간이 아니라는 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머릿속 한구석엔 업무 복귀 후 마무리 해야 할 일들과 협업하며 느꼈던 매끄럽지 못한 관계들, 아직 확인하지 않은 이메일 등이 앙금처럼 가라앉아있었으니깐 말이다. 회사를 졸업하고 나니 이제 더 이상 회사로 인한 앙금이 없다. 카카오톡의 99.9% 을 차지했던 회사 톡도 더 이상 없다. 여행지에서 핸드폰은 나침반일 뿐 업무 흐름을 파악해야 하는 도구가 아니다. 구글맵을 켜 내가 가고 싶은 장소의 위치를 확인하고 내가 담고 싶은 순간을 찍고 다시 보기 기능만 할 뿐이다. 늘 회사를 염두에 두었던 내 무의식이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세상은 넓고 볼거리, 들을 거리, 즐길 거리들이 많다. 여행에서 느끼는 그 순간만을 온전히 누릴 뿐이다.
아이의 병치레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자유
온전히 누리는 삶은 여행 후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유효하다. 내 시간은 온전히 나와 나의 소중한 가족들을 위해 흘러간다. 특히나 아이가 아플 때 아픔을 참지 않고 병원에 데려갈 수 있어 행복하고 그 아픈 아이를 품에 꼭 안고 같이 낮잠 잘 때, 그렇게 할 수 있어 더없이 감사하다. 회사를 다닐 때 점심시간에 점심도 거르고 서둘러 병원에 갔다 아픈 아이를 다시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거른 점심은 젓가락도 필요 없는 은박지에 돌돌 만 김밥으로 대신했는데 냄새가 제법 나 비상계단에서 먹곤 했다. 한 번은 그 모습을 동료가 봤다. 아니 '동료에게 들켰다.'라고 하는 것이 내 심정이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되어 '들켰다'라고 생각했고 부끄러웠다. 이젠 더 이상 비상계단에서 차가워진 김밥을 어그적 어그적 먹지 않아도 되고 부끄럽지 않아도 된다. 아이가 아프면 바로 병원에 데리고 가고 쉬게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얼마 전 폐렴으로 아들이 1주일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바쁜 친정엄마에게 손 빌릴 필요도 없이 내가 아들 옆에 온전히 있을 수 있어 감사했다. 이제 '회사 일정'이 '아이의 아픔'보다 먼저 있는 일은 없다. 안타깝게도 이 당연함을 회사를 나오며 할 수 있게 되었다.
날씨 요정 따윈 기대하지 않아도 될 자유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하루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심난한 날인데 회사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게는 다행히 아니어도 되는 날들이 생겨난다.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고 눈이 오지 않아 한시름 놓는 날이 사라졌다. 비가 오면 빗소리를 감상할 수 있어 좋고 눈이 내리면 새하얀 풍경에 감탄할 수 있는 날들이 늘어난다. 추운 날 내복까지 껴입고 발을 동동거리며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이 어릴 땐 쌍둥이 유모차를 두 손으로 끌고 우산 쓸 손이 없어 비 맞아 가며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출근했다. 그런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은 컸고 아침 일찍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 겨울철 깜깜한 밤이 이르게 찾아와도 '해가 짧아졌네!' 하고 의식할 뿐 밤길 눈이 어두워 온몸을 긴장해 가며 퇴근길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 밖이 깜깜한데 여전히 나는 사무실 책상 앞에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고 어린이집에서 나를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며 내 마음도 깜깜해지는 날도 이젠 없다. 세상 만사태평 천하로세!
보고 싶은 사람만 볼 수 있는 자유
시공간의 자유를 떠나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내가 보고 싶은 사람만 볼 수 있다는 거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보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을 일 때문에 억지로 볼 필요가 없다. 회사는 작은 이익 집단끼리 모여 있다. 조직별 업무 분장에 따른 역할과 책임이 있고 때론 그 경계가 모호해 네 일이니 내일이니 그쪽 책임이니 저쪽 책임이니 옥신각신 한다. 각자의 일임을 서로 명시적으로 알고 있음에도 공장조립라인처럼 서로의 일이 맞물려 있어 저쪽에서 제때 나사를 정확히 박아서 주지 않으면 뒷일을 이어받는 쪽이 피곤하다. 한두 번이야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하는데 매번 그러면 함께 일하기 골치 아프다. 그러니 불편한 말이 오가고 진정 안 보고 싶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으리라, 조직생활의 생리가 그런 거지 뭐 하고 넘기고 싶지만 불편한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는 불순분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더 이상 그 불편한 감정을 받지도 주지도 않게 되어 기쁘다. 진정한 인디펜던스(independence)다.
고로 회사를 나온 날은
나에게 인디펜던스 데이 (Independence Day), 독립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