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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Oct 15. 2020

탁묘를 하다

어쩌다 고양이




“친구가 고양이를 잠시 맡아 달라고 하는데
혹시 어떻게 생각해?”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다. 남편의 지인이 이사와 출장 등으로 집을 장기간 비우게 되어, 집이 가까운 우리에게 탁묘를 부탁한 것이다. 고양이라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기대도 잠시, 덜컥 두려움이 몰려왔다. 한 번도 고양이를 키워본 적 없는데, 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갑자기 탁묘를? 게다가 나는 퇴사 후 집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었기에 하루 종일 나 혼자 고양이를 케어해야 할 게 뻔했다. 늘어나는 집안일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홀로 고양이를 책임져야 하는 시간이 두려웠던 것이다.


남편도 고민은 있었다. 고양이를 탁묘하고 나서, 내가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져버려 '우리도 지금 당장 한 마리 데려오자'라고 조르는 건 남편이 바라는 스토리가 아니었다. 혹은 본인이 더 빠져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우리는 조금 망설였지만 그런 두려움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포기하기는 아쉬웠다. 솔직히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까? 귀여운 고양이와 3주 동안 집에서 함께 살게 되다니. 지인의 고양이는 2살 정도 된 스코티쉬 폴드로, 이름은 ‘티봉’이었다. 회색 줄무늬가 매력적이고 반쯤 접힌 귀가 귀여운 고양이. 


스코티쉬 폴드 티봉이. 늠름하다


잠시 동안의 고민 끝에 우리는 오케이를 했고 그 즉시부터 나는 고양이와 관련된 유튜브를 몰아 보기 시작했다. 고양이와 친해지는 법, 고양이 적응 기간, 고양이 탁묘, 고양이 감정 읽는 법, 고양이 주의사항 등등. 몇 주 뒤 지인의 고양이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고양이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은 달달 읊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고양이 랜선 전문가라고나 할까.


하지만 몇 주 동안 본 유튜브 동영상들은 실제 탁묘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분명 유튜브를 통해 내가 공부한 바로는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 최소 몇 시간에서 며칠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티봉이는 보통 고양이가 아니었다. 이동장을 여는 순간 망설임 없이 바로 나와 주위를 살피고 나에게 다가와 다리에 털을 묻혔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공간을 금세 휘리릭 탐험한 티봉이는 우리가 세팅해 준 자신의 화장실에 들어가 바로 똥을 싸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티봉이의 구수한 향기를 처음 접한 공기청정기는 빨간빛을 뿜으며 시끄럽게 열일했다. 동글동글하고 약간은 뚱냥이 느낌이 나는 티봉이는 실제로 보니 사진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고양이와의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조금 무섭긴 했지만 티봉이가 워낙 경계심이 없었기에 나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티봉이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다고 사람을 엄청 좋아하는 개냥이도 아니었다. 우리를 보면 인사는 해주지만, 짧은 인사 후 시크하게 제 갈 길 가는 고양이. 무던한 성격의 티봉이는 그렇게 우리 집에 금방 적응하는 듯했다.


하지만 잘 적응한 것처럼 보였던 티봉이도 모두 잠든 새벽이 되자 집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낯선 환경에서 우는 건 흔한 일이고, 시간만이 해결해 주는 일이지만 고양이가 처음인 우리는 알지 못했다. 새벽에 티봉이가 서럽게 울면 나는 거실로 나가 티봉이와 놀아주거나 잘 타일러 보려 했다. 당연히 별 효과는 없었지만, 불면증에 잠 귀까지 무척이나 밝은 내가 그 상황에서 잠들 수는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다. 하지만 거실에서 티봉이와 놀아주는 소리 때문에 잠 귀가 어두운 남편까지 새벽에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가뜩이나 예민한 내가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몇 배의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다. 화장실 청소나 냄새, 털 빠짐 등의 문제들은 차치하고, 이렇게 사소한 문제들로 매일 호들갑을 떨었다.


예를 들어 티봉이가 들어가선 안 될 곳에 들어가려 하면,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야단법석을 피웠다. 고양이는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라 가고 싶은 공간이 있다면 어떻게든 들어가야만 하고, 액체동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연해 엄청나게 좁은 공간에도 들어갈 수 있다. 또, 한 번 어떤 공간에 들어갔다면 앞으로도 계속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다. 만약 고양이가 어딘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그 공간이 없던 것처럼 막아 놓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그 사실을 미리 알았을 리 없다.


우리 침대는 프레임이 바닥에 붙어 있는 디자인이라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벽과 붙여둔 옆 면이 ㄱ자 모양으로 생겨서, 벽과 침대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겼던 것이다. 우리는 이 틈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가 오기 전 까지는. 하루는 티봉이가 침대 옆에서 어슬렁 거리길래 뭘 하나 했더니 이미 그곳에 한 번 들어갔다 와서 재정비를 하고 있던 거였다. 알고 보니 그 틈은 고양이가 들어갈 수밖에 없게 생긴 아주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문제의 그 공간. 현재는 책으로 아주 단단하게 막아두었다


나는 먼지가 얼마나 쌓였을지 모를 그곳에 티봉이가 들어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몇 주간 탁묘하는 고양이 때문에 무거운 침대를 옮겨 그 틈을 청소하기는 귀찮았다. 우리는 그 공간을 책들과 구긴 담요 등으로 막아두기로 했다. 하지만 한 번 그 안에서 재미를 봤던 티봉이는 며칠 동안 그 앞에서 울며 굴을 파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티봉이가 그 틈 근처에만 가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티봉이를 그 공간에서 떼어내려 하거나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려 애썼다.




이런 일도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집에서 일을 하다가 잠깐 거실로 나와 보니 티봉이가 어디에도 없었다. 숨을 데도 없는 데 어디로 간 거지? 온 집 안을 샅샅이 찾았지만 없었다. 문도, 창문도 다 닫혀 있어 나갈 수도 없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내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바로 주방 싱크대 아래의 좁은 틈. 


사실 우리 집에 이사 올 때부터 싱크대 하부장 아래에 아주 좁은 틈이 있었다. 싱크대 하부장 아래에는 원래 하부장과 바닥을 연결하는 판자가 그 틈을 막아 두는데, 왠지 그게 살짝 어그러져 있던 것이다. 사실 마음먹고 제대로 끼우려면 끼울 수 있었겠지만 아일랜드 식탁에 가려져 잘 안 보였기 때문에 그동안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던 틈이었다. 


티봉이가 있을 곳은 그곳밖에 없었지만 한참을 불러도 티봉이는 나오지 않았다. 어떤 움직임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츄르를 그릇에 짜 틈 안으로 밀어 넣고 기다렸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혹시 이 안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또 다른 구멍이 있다면? 아무리 작은 구멍이라도 또 거기로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그럼 대체 어떻게 찾지? 혹은 만에 하나 티봉이가 여기에도 없다면? 우리 집 고양이도 아니고 (물론 우리 집 고양이라도 문제지만) 지인의 고양이인데, 만약 진짜 잃어버린 거라면 정말 큰일이 난 거였다. 혼자 있던 나는 어쩔 줄 몰라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회사에 있던 남편도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틈 사이로 티봉이가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릇을 내 쪽으로 당겨 티봉이를 유인했고 티봉이가 츄르에 정신이 팔린 사이 틈을 막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일들이겠지만,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난감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기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고, 별 것도 아닌 일들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썼다. 이런 나 때문에 옆에 있는 남편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것에 비하지는 못하지만, 역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티봉이가 우리 집에 온 후 이틀간 우리는 꼬박 집에만 있었다. 주말이었기에 나갈 일이 없기도 했지만, 티봉이를 혼자 두고 외출하는 게 마음에 걸려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틀 동안이나 집에만 있으니 너무 답답하기도 했고 일요일 저녁은 오랜만에 간단하게 외식을 해볼까 해서 3일째 되던 날 첫 외출을 했다. 밥을 먹는데 우리 둘 다 음식에 집중하지 못했다. 티봉이가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려서, 남편도 나도 얼른 먹고 집에 다시 들어갈 생각뿐이었다. 2시간 정도의 짧은 외출 후 헐레벌떡 집에 들어갔지만 티봉이는 돌아온 우리를 본 체 만 체 했다. 사실 티봉이의 집사는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귀가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에 티봉이는 혼자 있는 것에 익숙했다. 2시간 정도는 티봉이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양이보다 임시 집사들이 더 분리불안이었던 것이다. 


고양이와 함께하는 생활은 생각보다 더 신경 쓸 일이 많았지만, 티봉이와 함께 지내며 나는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양이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지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티봉이가 낯을 가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애교가 많은 성격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하면 종종 내 근처로 와서 잠을 잤다. 일을 하다가 잠깐씩 잠든 티봉이를 보면 처음 드는 감정이 샘솟았다. 우리 집 고양이가 아닌데도 꼭 우리 고양이처럼 느껴졌고, 그냥 보고만 있어도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티봉이의 자는 모습


남편 또한 퇴근 후 집에 왔을 때 티봉이가 인사를 해 주면 너무나 좋아했다. 도도해 보이다가도 가끔은 먼저 다가와 주는 고양이의 매력에 우리는 점점 빠져 들어갔다. 원래부터 대화가 많은 우리 부부였지만 고양이가 있으니 대화할 거리도 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우리가 고양이에게 해 주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가 고양이에게 얻어가는 것이 더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는 티봉이와 점점 더 정이 들어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3주가 흘렀다. 티봉이가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엄청난 허전함을 느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일하며 티봉이와 함께 있던 내게 티봉이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더 컸다. 커지는 외로움에 “고양아~, 고양아~” 허공에 불러보기도 했다. 티봉이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눈치 없이 기가지니가 대답했다. 기가지니 너 말고, 티봉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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